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면 (문단 편집) === 초년기 === 김규면은 1880년 3월 12일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태양동의 빈농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뒤 교육자가 되려 했지만, 교원이 되기 힘들어지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후 일제가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하면서, 친러시아 성향이 짙던 함경도 출신의 무관학교 학생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에 그는 군인의 길 역시 포기하고 서울과 원산을 돌며 상인으로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말콤 C. 펜윅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펜윅을 통해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 및 학교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07년 가족과 함께 만주 혼춘으로 망명한 그는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 소속의 전도사로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오가며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후 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한인 사회의 민족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동휘]], 김성무(金成茂), [[장기영(1890)|장기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한 끝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중국 왕청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던 1915년 조선총독부가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해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하고, 일제 경찰들도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한기독교회가 이를 따르기로 하자, 김규면은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결성했다. 그는 혼춘현 초모정자에 교단 본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교세를 확장시켰다.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결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