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면 (문단 편집) === [[러시아 내전]] 시기의 행적 === 1918년 3월 연해주 한인사회는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김알렉산드라]]와 [[홍범도]], [[이동휘]] 등 중국·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은 훈춘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 [[유동열]], 이인섭(李仁燮) 등은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창당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동휘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듬해 한인사회당에 가입했다.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했다. 이에 김규면은 초모정자에서 대한성리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3월 12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창설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는 강령을 통해 “조국(祖國)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며, “민족(民族)의 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하고 국부적(局部的) 당파(黨派)와 불공평적(不公平的) 야심(野心)을 박멸”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민단문답(新民團問答)’을 통해 단체의 기원과 이름을 ‘신민회(新民會)’에서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19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대한신민단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한인사회당과 대한신민단,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이 참석한 이 당대회에서는 3개 단체의 통일 연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는 통합에 동의하고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당의 결정에 따라 만주에 위치한 대한민신단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시켜 빨치산 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려 했다. 1919년 5월 [[김경천]]이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일대에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을 조직하자, 김규면은 여기에 가담해 명예단장에 취임하고 부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지원했다. 1920년 7월 레닌그라드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박진순]]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곧이어 연해주로 돌아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의해 체포될 뻔했다. 당시 마자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사용할 의류와 약품 등의 물품을 준비한 그는 아무르 주 당국과 독립군 부대 수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블라고베센스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혁명군이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블라고베센스크 당국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블라고베센스크의 신문에 자신들이 그를 체포하려 했던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사할린부대)와 독립군 통합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김규면이 속한 한인사회당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할 것을 지지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김규면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블라고베센스크 당국의 도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 김규면은 얼마 후 [[자유시 참변]] 소식을 접한 뒤 [[장기영(1890)|장기영]], 이용(李鏞), 한운용(韓雲用) 등과 함께 이만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만은 극동공화국과 백군 정부의 분계선 지대로 자유시에 있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힘이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홍일]] 등이 군비단(軍備團) 군사부를 개편해 만든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1921년 9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이 이만으로 이동해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를 재편했다. 이때 김규면은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당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1922년 연해주에서 철수를 결정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게 그 대가로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를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한인 빨치산 부대를 무장해제시킨 후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남·북만주나 중국 관내로 떠나기 시작했다. 김규면 또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영과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에 관찰원 자격으로 참석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한 창조파가 구성한 조각에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임시정부의 존속을 주장하는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