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식(1882) (문단 편집) === 초년기와 의병 활동 === 김규식은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목 구지면 사노리(현재 구리시 사노동 안말마을)에서 아버지 김영선(金永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궁내부 또는 궁중 소속의 낮은 관직에 종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의 집안은 조상들이 물러준 재산이 꽤 있었고, 훌륭한 기와집도 있었다고 하니 대체로 중농 이상의 비교적 넉넉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의 박해를 받으며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김규식의 외동딸 김현태가 1990년에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김규식은 15세의 나이에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의 처자 주명수(朱明洙)[* 호적명 주명래.]와 서울에서 혼인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또한 김현태는 부친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그의 집은 제삿날 같이 사람이 조금만 많이 모이거나 부친이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일본 형사가 찾아와 괴롭혔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친은 만주로 망명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후 경찰서로 끌려가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 1925년경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의 연락을 받고 온 가족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야반도주하듯 국내를 빠져나와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도착했다고 한다.[* 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p.96~99, 1996] 김규식은 1902년 1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으며, 그가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재판기록[* <김규식 판결문>, 경성공소원, 1908년 8월 25일]에 따르면, 김규식은 의병에 가담할 당시 연령은 26세로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 돈암리(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했으며, 1906년 10월에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교(副校)로 육군연성학교에서 봉직하던 중 퇴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기록한 <요시찰인명부>에 따르면 김규식이 '명치(明治) 37년(1904년) 12월 [[대한제국군 시위대|구한국 시위대]]에 입대하여 명치 39년(1906년)까지 육군 보병 부교로 승진해 명치 40년(1907년) 해산칙령에 의해 제대'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1907년 6월에 육군 정위(正尉)였던 [[현덕호]]가 주관하는 이현기독신흥학교(梨峴基督新興學校)의 교무(校務)에 관계하던 중 7월 중에 현덕호와 함께 양주군 이담면 가정자리 동두내(현 [[동두천시]] [[동두천동]])에 가서 의병장 [[허위(독립운동가)|허위]]의 휘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규식은 50~60명, 혹은 80여 명의 부하를 휘하에 두었으며, 총검을 휴대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힘쓰는 한편, [[경기도]] [[연천군|마전군]], [[연천군|삭녕군]], [[연천군]], [[양주시|양주군]], [[강원도]] [[철원군]] 등지에서 4~5차례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료 의병 김창순이 사망하자, 그는 장례비용과 군자금에 충당하기 위해 양주군 노원면 불암동(현 [[남양주시]] [[별내동]] 불암동마을)에서 송인식 등에게 1,800냥을 거두었다. 또한 허위와 함께 [[이인영(독립운동가)|이인영]]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907년 12월 양주군에서 결성된 [[13도 창의군]]에 합류하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사령장(使令將)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병장 박기섭과 연락하고, 황해도 의병은 [[장단군|장단]] 의장 [[김수민(독립운동가)|김수민]]과 상련하고, 김수민은 [[철원군|철원]] 의장 전 참위 김규식과 연통하고 김규식은 [[파주시|적성]], [[연천군|마전]] 의장 허위와 상통하고, 허위는 [[양평군|지평]], [[가평군|가평]] 등지의 이인영과 통섭하고 이인영은 [[제천시|제천]], [[영동군|영동]] 등지의 [[이강년]]과 상통하고, 이강년은 [[원주시|원주]] 등지의 의장 [[민긍호]]와 연접되어 호상 통첩하다"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28일자 기사] 김규식은 허위의 지휘를 받으며 1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연기우]]와 함께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허위의 소재를 밝히려는 일본군에 의해 강원도로 끌려가다가 밧줄을 끊고 탈출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10일자 기사] 그러나 1908년 4월을 전후하여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부]]에서 일본군에 또 다시 체포되었고, 1908년 8월 25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내란죄]] 혐의로 유배형 15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77&evntId=0034972370&evntdowngbn=Y&indpnId=000000471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2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 특별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