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전 (문단 편집) === 정치투쟁 및 독립운동 === 한편 발행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라는 수난을 당하며 7년 동안 일제에게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 불리고 있던 '개벽'지는 1926년 8월 1일 마침내 잡지로는 사형이나 다름없는 발행정지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마지막 제72호를 전부 압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제본된 책을 일일이 작두로 썰어버리는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존의 어린이운동과 함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계속 펼쳐나갔다. "반만년 동안을 짓밟히고 쥐물리고 눌리우고 속히우고 빨리워서 항상 큰 불안과 공포와 빈천에 결박되어 살아오던, 전 조선인구의 9할이나 되는 농민대중의 인격적 해방"을 위해 조기간, 이돈화 등과 함께 '조선농민사'라는 조직을 결성하였고, 잡지 '조선농민'을 발간하였으며, 1929년 1월~4월 원산대파업이 100일의 파업 끝에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노동사'라는 조직까지 결성한 것이다. 1926년에는 "향후 예상되는 일본의 국제적, 정치적 위기를 포착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기존의 천도교청년회를 모태로 한 오심당을 조직하여 스스로 당수가 되었다. 1926-1927년에 자신은 중국으로 가고, 조기간은 소련으로, 박사직은 일본으로 보내 각국 정세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한 독립활동을 했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종교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천도교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지방 순회길에 오르면, 역전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구름 같았을 정도로 천도교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간의 독립운동을 위한 행적이 일경에 의해 발각되어 1934년 9월 19일부터 사흘에 걸쳐 자신을 비롯, 전국 230명의 핵심당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른바 '오심당 사건'이었다. 그 뒤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일경의 취조를 받았으며 폐[[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때를 같이 하여 그가 관여하던 어린이 대상 잡지인 “어린이”, “신소년”, “영데이” 등이 폐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