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전 (문단 편집) === 말년의 시련 === 1936년 마흔셋의 나이로 해주요양원에 들어갔다. 1937년에는 [[경주시|경주]] 근처의 용담정에서 3개월 여 동안 머물렀다. 그래도 완쾌가 되지 않자 서울 우이동으로 올라와 생식으로 수행하며 병마와 싸웠다. 그렇게 10여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숱한 탄압과 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 창씨개명을 비롯한 그 어떤 반민족행위도 거부하며 살았다.[* 김기전이 일제의 회유를 일체 거부하고 극도의 가난 속에서 은둔생활을 할 동안 그의 동지 이돈화는 일제에 타협하였다. 천도교 중앙종리원 편집과 주임종리사·지도관장·상주선도사·종법사·현법사 부도령·천도교 총부대령 등 행정상의 여러 중책 역임하였으며, 만주제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신징에 있었던 친일 우리말 신문인 만선학해사에서 1943년에 발행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천도교 발생사와 삼대장생관’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몸이 거의 완쾌되었을 즈음인 1945년에 조선이 해방되자, 천도교 청우당(청년당)을 부활시켜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개벽'을 속간하는 등 다시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남쪽보다 북쪽이 천도교세가 더 컸으므로, 북쪽 천도교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1946년 11월 북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1948년 3월 북한에서 반공의거운동(3·1재현운동)이 일어났을 때부터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아들 김석범의 증언에 따르면 북에서 온 심부름꾼 하나가 천도교 서울총부로 찾아와 "[[조만식]] 선생과 같이 감방(모란봉 형무소)에 있다고 전해주오. 그렇게만 말하면 알 것이오."라는 말을 전했다고도 한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월북]]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김달현의 밀고로 동지들 삼천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 하나로 버티다가 마지막에 허공을 보고 '우리가 그것을?'이란 한 마디를 외치고 숨졌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