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종 (문단 편집) == 이력 == 김기종은 [[1959년]] [[4월 3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출생해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집안의 [[장손|종손]]으로서 기대를 받으면서 자라났고 1978년 광주 [[금호고등학교(광주)|금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하여 입시에 여러 차례 실패하여 재수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다음해에도 [[서울대학교]] 입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2230109|관련 기사]] 대학 생활 중이던 [[1982년]]에 재수 생활에서 만난 붕우들과 함께 ‘바회’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84년]]에 설립한 ‘우리마당’의 전신격인 모임이라고 한다. [[1984년]]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82년 [[사법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운동권]]에 가담했으며 주로 재야 문화 운동에 주력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 국악모임 ‘한가락’, 극회 ‘벽돌’ 등을 창립하며 문화계에서 활동했다. 1985년에는 도서출판 ‘우리마당’을 창간하기도 했다. 우리마당을 중심으로 연극 공연, 국악강좌, 탈춤·풍물교실, 문예심포지엄 등의 활동을 했다. 우리마당은 1984년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총학생회 집행부와 함께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민정당사를 점거하였고]] 1985년 8월에는 회원 내부 조직을 결성해 미국 대사관의 성조기를 태우기도 했다. 우리마당 홈페이지에서는 "1986∼1987년 군사정권의 호헌에 맞서 직선제 개헌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며 소위 '[[6월 항쟁]]'의 참호가 됐다", "[[박종철]] 열사의 49제, 100일제 등을 주관집행했다"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에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집행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열사 장례식 집행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우리마당 블로그에 김기종이 올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1987년 장례 행렬에 봉사하였던 당사자들의 만족과 대단했다는 시민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엉뚱한 유명 인사 참가한 추모제를 지내는 방식들은 안타깝고 처량하기만 하다. 열사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한열열사 기일, 왜 6월9일 추모제 지내는 것일까? 열사는 6월9일 최류탄 부상으로 7월5일 돌아가셨다. 일반 노환의 기일, 즉 병환 후 운명하실 때 기일은?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우리마당은 집행했다. 당시 장례 의전에 획기적 방식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풍물패, 썽풀이춤, 만장 앞세운 상여꾼들이 농경사회 전래의 ‘노제’를 집행하며 소중하게 장례식 치루었다.''' 민주의 다짐 피어날수 있도록 판그림 상여를 만들어 열사 가시는 길의 백여만 인파가 함께 공감하였었다. >즉 시청앞 마중나온 시민과 연대감 형성하며 민주화 역사 새롭게 일구던 기억들 정말로 대단했을 뿐이다. >(중략) >열사의 뜻을 함께 계승하여 '''민주화운동 기여하고자 만장과 함께 150여명 풍물패 상여 행렬의 형성'''들은 당시 상계동 개발의 봉사활동경험 배가된 결과이다. >이처럼 우리마당은, 80년대 문화운동 경험 바탕으로 이한열열사 뿐 아니라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 의전을 맡아 새로운 의식 만들면서 모란공원 조성하게 된다. 즉 전태일 열사가 계신 곳을 민주성역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역사를 창출하며 '''열사들 뜻을 기리는 공감대 형성해주며 조직된 추모, 기념사업회가 출범 정신과 달리, 감투 이력을 다투는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다. 결국 아쉽게도 '''민주 팔아먹는 집단들 태어난 후에는 계산서들을 맞추는 탓인지, 봉사로 활동한 우리마당 같은 단체는, 몇 열사 기일과 추모제 연락 못받는다.''' >특히 '''90년대에 민예총 활동 공식화 되면서부터이다. 더 이상 우리마당 등의 봉사, 필요없는 利權 탓'''이다. 아무튼 보고하는 이한열 열사 뿐 아니라, 다른 열사 님들은 누구에 의해, 어떤 의전으로 운구된 것일까? 군사정권 때는, 장례의 기록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당시 사진 간직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확인하면 된다.[[http://blog.naver.com/wrmd/120194173704|해당 블로그]] 김기종의 글에는 [[조사]]가 없어서 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김기종의 글로 미루어 보아 "주관집행했다", "집행했다"고 말하는 활동의 실체는 장례식에서 풍물패 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기종의 주장을 최대한 수긍한다고 해도 가서 조금 도와준 걸 가지고 자신의 활동을 과장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기사에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7080009921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7-07-08&officeId=00009&pageNo=11&printNo=6567&publishType=00020|당시 기사]] 실제로 장례식의 경우 고인의 인연에 따라서 여러 단체(종교단체, 동문회나, 해병대 등)에서 봉사를 오기도 하는데 봉사하러 도와준 사람들이 모두 '주관해서 집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다. 즉, 봉사활동 해 놓고 자기가 모든 걸 다 한 것마냥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는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김기종의 민주화 활동에 대한 공헌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높다. [[1988년]]에는 올림픽 단독개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88년 8월에는 괴한이 사무실에 들어와 폭행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3/05/0200000000AKR20150305181400004.HTML|관련 기사]]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외래교수를 지냈다. 김기종은 당시 ‘전통예술의 이해’라는 교양과목 1강좌를 강의했다. 1999년 1월 북한에 갔다가 돌아왔다. [[국민의 정부]]에서 2001년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으며 2002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정부의 허가를 받고 2006년부터 2007년까지 '''6번 [[방북]]했다.''' 특히 2007년에는 [[종북]] 성향이 명확한 [[왕재산 사건]] 간첩 지역 총책이었던 임씨와 함께 방북했다. [[2007년]]에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이 때 '''전신 20%에 [[3도 화상]]을 입는 등 심하게 다쳤으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가까스로 소생했다고 알려졌다. [[2007년]] 분신자살 시도 이후 여러 차례 돌출행동을 벌였다. 지인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정신이 좀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한다. 김기종은 분신자살 기도가 계기가 되어 성공회대학교에서 맡았던 강좌가 폐강되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746141|관련 기사]]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별다른 수익 없이 문화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자산만 계속 소모하였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활동가들과도 단절이 심해졌다. 이러한 몰락 과정을 거쳐서 적어도 2014년 쯤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여 집세나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운영하던 단체도 이름만 걸어 놓고 혼자서 활동하는 '''유령 단체 수준으로 몰락했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306500052&spage=1|관련 기사]] [[2011년]] [[12월]] 북한의 [[김정일]]이 [[김정일/사망|죽었을 때]] 서울 도심에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여 보수 단체와 충돌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