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훈(쇼트트랙)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이승훈(스피드 스케이팅)|이승훈]]과는 반대로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쇼트트랙]]으로 전향한 케이스에 속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선수로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다가 선발된 것이다. 참고로 이때 1984년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은 최초로 시행된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으로 김기훈은 선발전을 거쳐 선발된 최초의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종목을 바꾼 데 대한 어려움도 있었으나 태릉선수촌에서의 혹독한 훈련과 당시 정상급 쇼트트랙 선수들의 비디오를 구해 분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1500미터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쇼트트랙은 시범종목이었다.] 이어 이듬해 [[소피아(도시)|소피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 3개를 쓸어담았다. 그리고 2년 뒤 [[1990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도 3관왕을 달성했다. 잠시 인대 부상으로 대표팀 에이스 자리를 [[이준호(쇼트트랙)|이준호]]에게 넘겨주기도 했으나 지독한 의지로 재활에 매진한 끝에 다시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이 대회 1000미터에서 김기훈은 선배이자 라이벌인 이준호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메달리스트|금메달리스트]][* 동시에 대한민국의 올림픽 통산 20번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가 되었다. 5000미터 계주에서는 에이스의 상징인 마지막 주자로 출전하여 이후 김기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날내밀기로 극적으로 캐나다를 꺾고 팀에 금메달을 안겼다. 당시는 개인전이 1000미터 한 종목밖에 없긴 했지만 전종목 석권을 [[http://youtu.be/J76AcsClw0w|달성했다.]] 마지막 코너에서 인코스의 좁은 틈을 파고들고 날내밀기로 역전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다.[* 이같은 날내밀기 기술은 지금은 볼 수 없다. 피니쉬 장면을 자세히 보면 김기훈과 캐나다 선수 모두 뒷발이 빙판에서 떨어져 있는데 현재는 피니쉬라인 통과시 스케이트날이 빙판에서 일정 정도 이상 들리면 실격이 주어진다.] 당시 계주 경기에 출전한 국가대표 멤버들은 김기훈을 비롯해 [[모지수]], [[송재근]], [[이준호(쇼트트랙)|이준호]]로 공교롭게 넷 모두가 이후 국가대표 지도자를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림픽 이후 [[미국]] [[덴버(도시)|덴버]]에서 열린 1992 세계선수권에서 전종목을 석권하며 5관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년 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이 때 당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세대교체론까지 제기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김기훈은 보란 듯이 1000미터에서 신예이자 자신을 이을 차세대 에이스 [[채지훈]]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올림픽 쇼트트랙 최초의 단일 종목 2연패를 [[http://www.youtube.com/watch?v=eCODd5Vzrbs|달성했다.]][* 두 번째는 사격의 [[진종오]]로, 이쪽은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최초로 2관왕과 2연패를 달성했고, '''3연패'''까지 해낸 남자 선수이다. 같은 종목 선수인 [[전이경]]은 동계올림픽 여자 선수 한정으로 최초로 2관왕과 2연패를 달성했고, 쇼트트랙 외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스피드 스케이팅)|이상화]]와 태권도의 [[황경선]], 펜싱 사브르 남자 단체전의 [[구본길]]과 [[김정환(펜싱)|김정환]]이 2연패를 달성했다.]이후 1998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했다. 이 때 나이는 31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