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남주(시인) (문단 편집) == 생애 ==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해남)|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http://aks.ai/GC07300730|태어났다]]. 고향 해남군에서 삼화국민학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광주시]]로 올라왔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이듬해 자퇴했고, 1969년 [[검정고시|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남대학교/학부 및 대학원|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10월 유신|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반(反)파쇼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 《함성》지는 주로 유신독재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다뤘고 후에는 전국적으로 신문을 확산시키고자 《고발》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출소 후 해남군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창작과 비평》지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1975년에는 광주시로 다시 올라와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개설했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 그가 구속된 사건이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남민전 사건]]이다.] 이듬해에 이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첫 시집인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같은 굵직한 시집을 출간했으며 시집들은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시집은 주로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에 손톱이나 이쑤시개, 날카로운 도구들로 꾹꾹 눌러 썼으며, 교도관이 시인의 아내[* 부인과 남민전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이 《진혼가》로 1984년에 출간됐으며, 문학계에서 큰 파장이 있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고,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45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종로구)|평동]] [[강북삼성병원|서울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 [[지병]]인 [[췌장암]]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21400239130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2-14&officeId=00023&pageNo=30&printNo=22602&publishType=00010|사망했다]]. 사후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광주)|북구]] [[망월동(광주광역시 북구)|망월동]] [[국립민주묘지|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