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김대중/일생 (문단 편집) == 사망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Kim_Dae-jung_presidential_portrait.jpg|width=100%]]}}} || || {{{#ffc224 '''김대중 대통령 공식 영정'''}}} || 결국 불과 3개월도 채 안되어 [[폐렴]]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전직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김대중의 사면여론 그리고 과거 용서 덕분인지 대통령이 된 이후 사이가 많이 호전되었다. 양김 모두 전두환에게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죽는 날까지 전두환과 악감정이 심했던 김영삼과는 달리 김대중은 전두환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전두환을 용서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끔씩 청와대로 초청하여 국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고, 이후 영결식 때도 직접 조문을 왔다.], 한때 경쟁자였던 [[이회창]]과 [[박근혜]], [[반기문]]을 비롯한 거물 정치인들이 문병을 왔다. 그러다가 [[2009년]] [[8월 18일]]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2818340?sid=001|결국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향년 85세.]] 이희호 여사가 서거 2주기 관련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한동안 서재에 앉아서 책만 읽을 정도였고, 병원에 입원하던 며칠 전부터는 죽도 제대로 못 먹을만큼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최경환(1959)|재택비서]]에게 "건강이 안 좋으니 병원으로 모셔가자"고 권유해서 병원으로 데려갔고, 입원 치료 초반에는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 보였으나 나중에 악화되어 결국 의식을 잃고 사망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식을 잃기 전 따로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서면으로 남긴 유언은 본인의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남긴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였다. 장례는 [[국가장|국장]]으로 진행되었으나 대통령의 생전 요청과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비교적 간소하게 치뤄졌다. 생전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음이 반영되어서 입관식 등의 절차는 천주교(가톨릭) 방식으로 치러졌다. 각계 주요 인사들이 조문을 왔으며, 북한에서도 애도의 뜻을 밝히며 조의 방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시신은 평소에 살던 집(사저)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있었고, 유가족들이 참배를 용이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요구해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되었으며, 단독 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차후 이희호 여사가 사망한 후 합장되어 더 이상 단독 묘역이 아니게 되었다. [[삼김시대|삼김]] 중 처음으로 고인이 된 인물이다. [[김영삼]][* 공교롭게도 '''김대중이 사망한 그 해에 뇌졸중 판정을 받았다.''' 두 사람이 평생의 친우이자 라이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부분.]은 2015년에, [[김종필]]은 2018년에 차례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