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대중/일생 (문단 편집) == 청년사업가 == 1946년 여름 [[좌익]]과 결별한 뒤에는 1947년 배 한척을 가지고 목포해운공사[* 1948년 동양해운, 1951년 목포상선주식회사, 1952년 흥국해운주식회사로 각각 상호변경되었다.]로 사업에 뛰어들고, 50~70톤의 선박 여러척을 보유,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국민주당 목포지부에 입당해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를 점령한 [[조선인민군]]들에게 '''자본가라는 이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철수해 처형은 면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한테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집에 은둔한다. 탈출길도 굉장히 험난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이 인생에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민족 간 전쟁으로 학살을 하는 모습''', '''이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 학살하고 증오를 뿜어대는 모습'''이 이후 그의 모토가 된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강력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환한 김대중은 훗날 이 동족 상잔의 비극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6.25 동란 때, 저는 서울에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공산당이 그렇게까지 잔인한 줄을 몰랐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공산당 얘기를 하면 자기들이 쫓겨 내려와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을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 25 동란 때문'''입니다. '''6 25 때에 공산당이 [[인민재판]]을 하고 숙청을 하고 또 농촌에 가서는 감 한 개까지 옥수수 한 개까지 세고 벼이삭까지 세서 세금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고, 게다가 길거리 좌판에 담배 몇 갑 놓고 파는 사람들한테까지 매일 세금을 걷어가는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쫓겨서 북으로 올라갈 땐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대량학살]]까지 했습니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이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 정도가 북쪽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 이들의 패악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인민재판의 실태를 알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김일성]] 동지는 이런 짓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대체 뭘 하고 있는가. 당장 이를 중지하라."'''고 격노했다고 한다.(출처 : [[박헌영]]평전) 사회주의 혁명의 노선을 따른다면 현지인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벌인 인민재판과 학살은 인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 점령지 주민들의 민심을 차버리는 짓거리였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측근으로 일하며 러시아 혁명에서 활약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민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고, 김일성의 어리석은 행동이 더더욱 못마땅했을 것이다. 김대중의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을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25 동란 때문"'''발언 역시 이걸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겠다.] 그때부터 남한사람 모두가 진짜 반공으로 돌아섰습니다. 오늘날까지 반공체제를 지탱해온 것도 안기부나 경찰의 노력보다는 그때의 산체험이 강력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덕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한길사, 1994 1950년 10월부터는 선박 두 척을 수리하여 사업을 재개하게 되었고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2년 3월까지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사장 직책으로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적, 물적 여건이 부족했던 만큼, 김대중도 직접 취재를 나가 중요한 내용을 적어 오곤 했으며, 사설을 직접 작성해 송고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자 출신 사업가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때 버릇들인 받아적는 습관이나,[* 일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젊은시절 DJ의 받아적는 습관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취재기술, 신문의 변두리칸 소식까지 꼼꼼히 살피는 습관 등은 측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만큼[* 총재인 DJ가 늘 '''뉴스'''를 면밀히 검토했기 때문에, 뭔가 소식거리를 가져오거나 이에 대해 제대로 연구해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중용되었다는 후문이다. 어떻게 보면 신문사 사장이 취재 잘해오는 기자들을 아끼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 정병국이 처음 상도동계로 들어가서 일했을 때 얼을 타는 걸 보고 [[김영삼]]은 '''"저 김대중이처럼 좀 꼼꼼하게 일좀 해라"'''고 했다고 한다.][* 문화방송(MBC) 뉴스 진행자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정동영]]이 입문 초기의 보좌관 시절 했던 첫 업무는 아예 DJ의 측근 [[박지원(1942)|박지원]]과 함께 '''새벽 6시에 총재 자택으로 출근해 김대중에게 뉴스를 일일 브리핑'''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생활이 고됐는지 정동영은 6개월 후 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지자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반겼다는 후문.] DJ의 정치인생을 형성하고 대변하는 바탕이[* 재택근무비서였었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DJ는 '''"정치는 50%가 돈이고, 50%는 '정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며(장성민, [[김종혁]] 기자 공저,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 214쪽), 이 정보를 얻기 위해 매일 일본 신문을 포함해 10여 가지의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토막소식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사업가 출신"이라기 보단, "언론인 출신"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6.25 전쟁]] 당시 행적으로는 김대중 본인은 목포 해상 방위대에 복무하였다고 주장하나 목포 해상 방위대와 관련하여서는 해군역사기록관리단[* [[대한민국 해군본부|해군본부]]의 직할부대] 확인결과 보관된 자료가 없어 부대의 창설시기나 규모, 지휘관, 기타 등의 확인이 불가하다고 [[대한민국 해군본부|해군본부]] 측에서 답변하였다. 해상방위대라는 조직이 목포경비부 기구표상에는 없다는 것. 하지만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001&aid=0004186731|동 조직(목포경비부)의 연혁사 제39쪽에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해군|해군]]으로 공식 보고가 올라갈 정도의 큰 활동(전공)은 없었지만, 엄연히 '''현지에서 해군에 협력한 민간 의용대''' 성격이 강했던 조직으로 추정된다. 행정력이 많이 미비한 전쟁 중에도[* 심지어는 [[장사상륙작전]]처럼 최소한의 병적기록과 작전 문서마저도 남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이분들이 탑승한 함선 잔해가 발견되기 전까진,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다는 후문.] 이들을 기록한 해군 산하의 공식 조직이[* 1946년 김장훈(金長勳) 제독이 창설에 관여한 해안경비대 목포조직(= 목포경비부). [[김성은(군인)|김성은]] 전 국방부장관이 당시 김장훈 제독 밑에서 참모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해안경비대 목포조직의 초창기 사령관 숙소 역시 DJ의 장인인 차보륜이 본인 소유가 된 적산가옥을 제공한 것이라고] 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