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도현(1852) (문단 편집) === 쳥년기 === 1864년 7월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 김도현은 주로 독학으로 학문을 닦으며 포부를 키웠다. 청년기에 접어들 무렵엔 안동, 예안 등지의 퇴계학통에 속한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특히 안동의 [[권세연]]과 [[이만도]]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1882년, 31살이 된 김도현은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 그러나 과거가 매우 문란해진 것을 보고 한탄을 금치 못했고, 마침 [[임오군란]]까지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했다. 1886년 마을에 괴질이 크게 일어나 동민 모두가 산야로 피신했다. 이때 김도현은 홀로 환자를 돌보는 한편 시체를 손수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등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1892년 <퇴계선생문집>을 구해 읽은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도덕과 문장을 고금에 떨치고 >요금의 끊어진 현을 마음으로 미루어 회복했네. >하늘과 땅의 이치 빨리 성취하여 >하도와 낙서는 천년의 신묘함이 마음과 함께 했네. >맑은 금회는 풍월에 있고 >향기로운 광경에 초화가 무성하네. >추생이 어찌 감히 표범을 엿볼 수 있으랴. >책 속에 좋은 말씀은 엄연히 임하신 듯하네. >---- >독퇴도선생문집유감(讀退陶先生文集有感) 또한 어지러운 시국을 한탄하며 <탄시사(嘆時事)>를 지었다. >동구에 풍랑은 이미 해를 넘기고 >밤을 깊고 깊은데 달마저 기울었네. >세상 길을 갈래 많아 살만한 땅 찾기 어려운데 >백성들은 하소연할 길 없어 아득히 하늘만 부르네. >꽃 같은 강호에서 어찌 원하는 군대를 얻을 수 있으랴 >초야에서 부질없이 밝은 인연을 생각하네. >구름같은 오랑캐 속에 앉아 긴 한숨 쉬워보지만 >조정에 가득한 소인들 그 어찌할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김도현은 상청리의 뒷산인 검각산에 석성을 쌓아 동학 농민군 침범에 대비했다. 이후 검각산성은 그가 의병을 일으킨 근거지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