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도현(1852) (문단 편집) === 을미의병 ===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 1895년 음력 11월 30일 종제 감한현이 영양읍에서 돌아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단발령에 의해 머리를 강제로 깎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의병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그는 1895년 음력 12월 1일 안동으로 가서 유원엽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을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한 뒤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이후 12월 3일 이웃 마을인 입암면 신사리에 살고 있던 친구 권한모를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다. 권한모는 급박한 형세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뜻을 밝혔지만 김도현이 뜻을 꺾지 않자 마침내 받아들였다. 12월 9일 영양읍에서 통문을 띄워 의병들을 불러모은 그는 고을 선비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12월 11일, 영양 일대의 유생들이 향회를 열었고, 김도현과 오석인, 조병희, 조영기 등 유생 4명이 선발되어 안동과 예안 일대의 정황을 둘러본 후 의병을 일으키기로 최종 합의했다. 12월 14일 김도현과 조영기가 안동으로 떠나 [[권세연]]과 안동의진을 둘러봤다. 김도현은 진영을 살펴보고는 탄식했다. >"무슨 진세가 이렇게 허술한가?" 다음날 이만도의 선성의진을 둘러본 그는 다음과 같이 호평했다. >"대장 이만도와 부장 이중린은 위의가 정숙하고 언론이 준절했다." 12월 16일, 김도현은 조영기와 함께 영양으로 돌아오면서 다음날 열리는 대향회를 기해 의병진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2월 15일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안동의진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도현은 곧 격고문을 돌리고 창의할 뜻을 굳혔지만 부친의 만류로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영양 일대 유생들을 만나고 장정들을 규합하는 등 창의를 모색했다. 1896년 정월 초하루, 김도현은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1874)|유시연]]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벽산선생창의전말>에서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병신 정원 초하룻날 두 손님이 동쪽에서 찾아왔으니 그 하나는 곧 유시연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청량에서 거의할 것을 말해주었다. 이튿날 이동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중략) 약 4일 후 갈현에서 서로 기다렸다가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며, 그 뒤에도 청량에서 왕래한 사람이 있었다. 약속한 기일이 되자 나는 내 아우와 종제, 그리고 일가 사람 및 마을 사람 19명을 데리고 오후에 갈현에 다다르니 이미 황혼이었다. > >순감 하나를 잡아가지고 밤에 어천을 지나 두곡에 다다라 밥을 먹으니 닭이 울었다. 이에 일찍 길을 떠나 산성을 넘어서 청량으로 들어가니 과연 초연적인 험한 곳이었다. 험한 비탈과 기이한 바위는 어풍대로 이것을 둘러 정사를 지은 곳은 강학소이다. 총을 가진 군사들로 대략이나마 군대의 모양을 만들어 즉일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골짜기 입구로 돌을 밟고 지나 비진촌에 도착하니 사람이 불을 켜 들고 기다린다. 이렇게 해서 1896년 1월 6일에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은 조직을 정비한 뒤 곧이어 봉화로 들어갔다. 이튿날 봉화에 도착한 그는 봉성을 점령하고 군수 안모(安某)로부터 총과 탄환을 지원받았다. 그는 봉성에서 의병을 끌어모은 뒤 1월 7일 영주로 진군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영주에서도 의병을 모으고자 했지만 현지 유생들이 이미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월 8일 입석, 온혜, 서고서재 등지에서 각기 하룻밤을 지냈고, 1월 11일 예안으로 회진한 뒤 이틀 밤은 예안에서 머물고 1월 13일 안동부로 출진했다. 1월 15일 안동부에 도착한 김도현은 영주의진이 안기에 진을 치고 있고 안동의진이 향교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두 의진에게 합칠 것을 청했지만 거부당했으며 그의 문벌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김도현은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뚜렷한 학통이나 학맥을 가지지 못해서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이다. 이후 안동을 떠난 그는 영양, 진보, 청송 등지를 돌며 뜻을 함께 할 의진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의성, 영덕, 영해 등지를 전전하다가 울령을 넘어 1월 20일 청기로 돌아왔다. 그는 청기에서 하루를 쉰 후 1월 22일 소청에서 예안으로 가는 갈령을 넘어 부포서재에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 그리고 1월 23일 예안으로 들어간 뒤 선성의진에 참여해 2월 13일 중군을 맡았다. 1896년 2월 16일, 김도현은 선성의진의 중군장으로서 태봉전투에 참여했지만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그와 함께 퇴각한 장졸은 15~16명 뿐이었다. 2월 18일 예안에 도착한 그는 중군장을 사퇴하기 위해 사면장을 올렸지만, 다음날 안동의진에서 구원을 요청해오자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안동에 도착했을 때,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이 불을 지른 뒤였다. 이에 예안으로 회군한 후 예안의 성을 고쳐 쌓고 방어책을 세우는 등 진용을 정비했다. 그러면서도 사면장을 3번이나 올렸고, 결국 2월 22일 대장 이중린으로부터 해임령을 받고 사직했다. 김도현은 사직 후 수기를 거두어 돌려보내고 상청리로 돌아왔다. 이후 안동도총 유난영의 초청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진보의진의 대장 허훈이 초청을 해오자 "어찌 이를 물리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하고 혼자서 말을 몰아 진보유진소로 찾아갔다. 그는 허훈과 논의를 한 끝에 안동의진의 군사 일부를 나눠서 얻어오기로 했다. 그는 군사 4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가서 안동의진의 도총 유난영을 만나 그의 부장이 된 후 [[김도화(1825)|김도화]] 대장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군사를 얻어오지는 못했다. 이때 관동창의장 [[민용호]]가 강릉에서 소모장 이호성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이호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도현은 <창의전말>에서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편지를 보니 내용이 몹시 긴하고 간결하며 의리가 명쾌해서 관동 전체의 모든 고을을 통솔하여 의병다운 세력을 이루겠다 했으니 참으로 의사였다. 나도 그를 보고자 해서 이를 허락하고 페랭이를 사서 의병들에게 쓰게 하고 모두 흰 옷을 입혔다. 집에 돌아가 하룻밤을 지내고 또 아버님께 고하고 나와서 먼 길을 가니 자식된 자로서 진실로 국가의 일이 아니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거느린 군사가 겨우 60명인데 집을 떠나 본읍에서 잤다. 김도현은 3월 10일 직접 방문을 작성, 배포해 의병을 모집하여 60명을 확보한 뒤 강릉으로 향했다. 음력 3월 하순 경 강릉에 도착한 그는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민용호]]를 보고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릉에 도착하니 민대장이 친히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들에 나와 기다린다. 함께 들어가 옆에 앉아서 보니, 용모는 단정하고 뜻은 굳으며 그 글이 또 날카로워 가히 의리를 성취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당포를 주어 우리 군사의 갖가지 옷을 만들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민용호는 <관동창의록>에서 김도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양에 사는 김도현은 용사 수백인을 모아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노를 포착하였는데, 각 의병진에서는 그의 가문이 미천하다 하여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다. 이에 스스로 돌격장이 되어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장군을 초청하니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왔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이후 김도현은 4월 10일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 밀려 구산역으로 퇴각했고, 그의 아우 김경옥과 김동현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후 민용호의 관동의진은 진영을 재정비하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또 패하고 정선, 임계 방면으로 후퇴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전투력이 약화된 데다 장마철이 되면서 의병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민용호와 김도현은 삼척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1896년 4월 12일, 강릉의진은 백복령을 넘어 삼척으로 이동하여 삼척 의병대와 합세했다. 민용호는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울릉도시찰사 염석하를 죽이고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에 맞설 수 있도록 진용을 갖췄다. 이후 4월 19일에 삼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민용호는 삼면에 의병을 배치해뒀다가 관군이 접근해오면 포위해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선봉장 김도현과 수성장 [[민동식]]은 성안에 매복하고, 유진장 김헌경은 죽서루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민용호 자신은 중군 최중봉, 강우서, 이영찬, 전치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치운]]과 동명이인이다.], [[신무섭]] 등과 함께 삼척 뒷편의 삼봉산 위에 참호를 파서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관군을 기다렸다. 관군이 삼척에 들어오자, 강릉의진은 일시에 포를 쏘면서 좌우에서 협공했다. 이날 아침 5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5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기습공격을 가해 주도권을 잡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탄약이 떨어지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이때 변복을 한 관군이 성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고, 전세는 더욱 급격히 기울어졌다. 결국 민용호는 울진의 오십천변을오 퇴각하고 말았다. 이날 관군은 "강릉으로 생환한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의병도 큰 피해를 입었다. 김도현은 성내에서 적과 격렬하게 싸웠지만 탄약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삼척 전투에서 패한 뒤, 김도현은 민용호와 결별하고 울진의 십이령과 일월산을 넘어 영양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친척과 면민들을 모아 읍내로 들어가 진영을 세우고 재기를 도모했다. 그가 처음 영양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라온 군사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이 10여 명을 불러 모아서 괴암서재에서 재차 창의하고, 소청의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아 진영을 편성했다. 이후 동생 김경옥, 김동현을 청송 덕천에 보내 청송의진의 거의를 촉구했으며, 자신도 각처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했다. 5월 6일 관군이 소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급히 소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본진이 관군에게 약탈된 뒤였다. 이에 검각산성의 성벽을 수리하고 진영을 재편성했으며, 이후 검각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이끄는 의병진의 무기는 화승총으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사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정거리도 30보를 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무기 수준이 월등한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유리한 지점에서 기습 공격을 했음에도 무기의 열세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거듭된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다. 6월 2일에 수비를 거쳐 옥령을 넘고 외선미, 내선미 등지를 전전하며 군수품을 거뒀으며, 관동의진, 예안의진 등과 협력했다. 그러던 중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대가 영덕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김하락이 강물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김하락 의병대에 속했던 잔여 병사들을 수습한 후 영양으로 회군했다. 그는 이들과 힘을 합쳐 영양읍에 있는 관군을 사로잡고자 했지만, 잔여 의병들은 이를 거부하고 청송 방면으로 갔다. 이에 김도현도 석보, 창암, 중노곡, 신기, 감곡, 중평 등지를 거쳐 청송의 상덕천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1896년 6월 10일, 김도현은 덕천에서 마평을 거쳐 대전으로 향하던 중 일본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으로 회군했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하던 그는 7월 14일 대천, 송점 등지를 거쳐 영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안동의진과 이천의진으로부터 연합하자는 요청을 받은 그는 안동의진과 합세하기로 결정하고 안동도총 김하림, 선봉장 유시연 등을 만나 몇차례의 논의를 거쳐 안동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을 받아 실행하지 못했고,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산지를 전전해야 했다. 8월 말, 김도현은 관군 병대장 김장옥으로부터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서신을 받았다. 이에 그는 <답병대장>을 보내 의병 활동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도현은 일개 벼슬없는 선비로 멀리 떨어져 발길조차 없는 곳에서 분연히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낭패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보니 "서북의 여러 고을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모두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지목하지만, 동남의 여러 진영은 오히려 해산하였는데 홀로 거의 우두머리로 여긴다"하였습니다. 만일 병사로 말할 것 같으면 헛된 이름만 있어 세상을 그르칠 뿐이고, 의리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이 떳떳한 충정이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의병으로서 돌아가기 불가한 것은 창천을 장차 어떻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 >지난 임진년으로부터 일본 오랑캐는 만대 원수국이 되었으며, 갑신년에는 [[박영효]]가 일대 역신이 되어 갑오년 6월 원수를 끌고 들어와 궁궐을 침범하고 임금의 명령이라 속여 우리 선왕의 중전(重典)을 능멸하였으니 이는 창의할 때 아닙니까? 을미년 8월 원수의 칼날이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창의할 때 아닙니까? 또 11월 역당들이 우리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으니 이것도 창의할 때 아닙니까? 아! 이 나라에 사람이 없음이여. 어찌 추로지교남에서 보고 지나치겠습니까? > >이에 머리를 깎이는 날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비록 늦다 할지라도 역시 춘추대의에 있어 당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이라 속인 사자들이 사방으로 나가 여러 진영을 모두 해산하였습니다. 아! 나 혼자서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까. 천전만도밖에 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목숨을 겨우 부쳐 살고 있으나 세상의 움직임을 지켜보면 우러러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공같은 분은 이미 강병부국의 계책을 가지고 벼슬길에 나와 병관에 이름을 올렸으니, 끝내 우리 임금을 도와서 바깥 오랑캐들이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여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바랍니다. 김도현은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진에 <통교남각진문>을 발송하여 의병 활동을 독려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의라는 것은 마땅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는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의가 있을 따름이다. 슬프다. 우리나라의 종사는 일도, 일향, 일가, 일신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동국에서 우리 임금과 신민으로 전성기 태평성대의 역대 임금이 배양한 해택을 입지 않은 이가 누구이겠는가. 평소 한가히 거처할 때는 스승이 강구한 도리를 또한 밝힐 따름이다. 이같이 만고에 없던 큰 변을 당해서는 나라를 위해 충으로 죽고 도를 위해 의로 죽으니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과 같은 것이다. > >창의 이래로부터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여러 의병진은 백 혹은 오십의 사졸로 서로 따르고 도망하는 것이 진실로 피차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일단 장래에 희망을 두고 가을을 기다려 다시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가을바람이 상쾌하고 이슬이 처량하니 동서를 바라보고 남북을 거슬러도 소위 저 사람이 물에 있으니 어느 방향으로 하늘을 우러러도 욻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엎드려 바라오니 각 진영의 모든 분들은 구차히 삶을 도모하지 말고 빨리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을 수 있도록 결정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수령들에게 고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서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평안히 하여 우리의 지난 날 대동방예의의 나라를 회복한다면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1896년 8월 말, 김도현은 일월산 조록동으로 들어가 6일을 머물며 재기를 모색하고 영남 각처로 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은 장기간의 전투로 피로가 쌓인 데다 관군의 토벌 작전과 해산 종용으로 동요했다. 결국 각처의 의병진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선성의진은 8월 14일 향회를 열어 의병을 해산했고, 안동의진도 8월 말부터 해산을 시작했다. 김도현도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총 113자루를 갈령의 인가에 은닉하게 한 뒤 해산을 준비하면서 영양 지역 각처를 전전하다 일월산으로 들어가 양수정에 머물렀다. 9월 초 선유어사의 글을 받고 회신한 뒤, 9월 9윌 따르던 포졸 10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의병진을 해산했다. 그는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