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도현(1852) (문단 편집) === 순국 ===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도현은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손자 김여래가 기술한 <도해일기>에 따르면, 그는 자살하려 했지만 늙으신 부친이 있었기에 차마 결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만도]]가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즉시 이만도를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청구일기>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벽산(김도현)이 문안을 여쭙자 향산(이만도)은 "우리 둘은 마음으로 서로 친한 지가 이미 여러 해인데 어찌 멀리서 나를 보러 왔는가?"하며 맞이하였다. 제자의 방문을 대하는 향산의 응대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벽산은 울먹이며 차마 응대하지 못했다. 곧 작별인사를 올리고 영결하면서 벽산은 "선생님, 쉬이 뵙겠습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말을 남꼈다. 이후 이만도가 끝내 순국하자, 김도현은 조문을 드리며 <곡향산선생문>을 제문으로 바쳤다. >선생님의 대의는 못난 제자가 알고, 못난 제자의 마음은 선생님께서 아십니다. 못난 제자의 눈물을 피 끓는 마음에서 흘러 나오나니, 선생님의 영령도 제 제주 위로 강림하소서. 아, 애통합니다. 상향(尙響) 그는 이만도가 죽은 뒤 일제가 보낸 은사금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냈다. 그러던 1914년 9월 3일 부친이 85세를 일기로 영면하자, 그는 그동안 고민해온 자결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1914년 12월 17일, 부친의 상례를 마친 그는 다음날 장손 여래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나는 중년부터 시절을 아파하고 나라를 걱정하느라 뜨거운 피가 가슴 속에 가득하였는데, 오늘 갑자기 가슴이 크게 열리고 심기가 상쾌하고 명랑하니 만사가 저절로 정해진 것 같다. 싫어하는 것에는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며, 원하는 것에는 살아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오늘에서야 맹자가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진실로 알겠다." 그는 이어 여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줬다. >이제야 죽는데 어느 땅에서 죽을고 >옛 나라에는 남은 강토가 없구나 >노중련은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었건만 >밝은 달과 같이 오히려 빛나는구나. 여래가 만류했다. >"할아버지께서는 한 번의 생각으로 결정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여 멀리 외진 땅에 피신하여 국내외의 지사들과 친히 결맹하여 국제 정세를 살펴 원수 오랑캐를 쳐부수고 국권을 회복하여 광복을 보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김도현이 대답했다. >"나도 생각을 깊이 하였다. 그 시세를 들어보니 천에 하나도 기대할 수 없는 운수에 당해 있으며, 천하대세도 뜻밖으로 어렵게 되고 있으니 어찌 약속하여 기다릴 수 있겠는가? (중략) 을미년 8월에는 국모께서 차마 듣지 못할 화를 입었고, 이해 11월에는 성상께서 가히 말 못할 치욕을 당했으니, (중략) 마침내 집을 기울이고 재물을 뿌려 의사를 모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이로써 복수하고 부끄러움을 씻을 기약을 하였더니, 뜻밖에 선유사가 사방에서 나와 해산하라는 명을 전하였다. (중략) 을사년 10월 20일에 이르러서는 (중략) 마침내 영남의 사대부들이 더불어 소를 올려 담판을 행하고자 하는 의논을 한 뒤 두려움에 떨며 서울에 올라가서 같이 모이기로 하였는데, 모인 사람은 불과 3~4인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 >경술년에 이르러서는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였으나, 고당을 우러러보고 감히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금년 7월에 하늘도 불행하게 노친께서 천년으로 세상을 버리시니 (중략) 장차 대가를 남으로 옮겨 흥복을 도모하자면 한 사람이라도 북해로 쫓아가서 은밀히 광복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막연하게 되었다. 아! 천하의 일이란 가히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말인가? 만약 천지에 봄이 돌아온다면 세상의 일도 정해진 대로 돌아갈 것인즉, 내 비록 있지 않아도 가히 이루어질 것이다. 좋은 운수가 돌아오지 않으면 세상의 일도 오히려 정체되고 말 것인즉, 내 비록 있더라도 역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그는 자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원컨대 너희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음덕을 베풀고 음해를 가하지 마라. 선행을 쌓아라. 선행이 많으면 경사가 후손에 넘친다. 악을 징계하고 악을 징계하라. 악행이 많으면 재앙이 자손에게 이어진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 선악 두 글자를 더욱 절실하게 말하노니 너희들은 함부로 듣지 말고 가슴에 새겨두어라." 12월 19일, 김도현은 부친의 빈소에서 곡을 한 후 8살 된 증손 기팔을 불러 "글을 부지런히 읽어라"하고 집을 나섰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깨닫지 못했지만 손자 여래가 의심이 들어 물었다. >"할아버지 장차 어디로 가십니까?" >"청기에 간다. 어제 다하지 못한 말이 있어 이제 다시 간다." 이후 김도현은 청기에서 친구 김병식을 만나 오언일절(五言一絶)을 써서 벗에게 주었다. >당세의 평원군은 어찌 노연자와 같았든가 >내가 가라앉은 곳을 알고자 하거든 동해에 가서 물어보게나. 김도현은 김병식과 헤어진 뒤 동쪽으로 곡령을 넘어 읍동, 문현을 거쳐 대천 오세호 집에 이르렀다. 김병식은 그 사이에 아들 형팔을 소청의 벽산가로 보내 김도현의 손자 여래에게 "할아버지께서 지금 동쪽으로 향하여 가셨다"고 알렸따. 이에 여래는 청기를 거쳐 대천으로 달려가 김도현을 만났다. 김도현은 손자를 보고 말했다. >"너는 무엇하러 왔느냐? 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너희들은 달리 구분하여 대처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분분히 따르면 한갓 나의 자취만 드러나서 도리어 나의 마음만 상할 뿐이니, 급히 돌아가라." 그러나 여래는 끝내 떠나지 않았고 뒤이어 김도현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그를 모실 것을 밝히자, 김도현은 체념하여 말했다. >"너희가 나를 굳이 따르고자 하니, 끝내 물리치지 못하겠다." 이후 김도현은 자손들과 함께 지난날을 회고한 뒤 12월 22일 새벽 유서 <여국내동포>를 작성했다. >고신(孤臣), 고애자(孤哀子) 김도현은 피눈물을 흘리며 대동조선국의 모든 군자들에게 우러러 고합니다. 오호라 슬프다. 도현은 일찍이 <한서>를 읽다가 우리 선성 공자께서 "조선에 살고자 했다가 동남 바다의 섬에 수많은 왜놈 종자가 있어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부자(夫子)께서 어찌하여 왕도를 우리 동국에 베풀지 아니했는지, 그때 이후로 부자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을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 명나라 영력 이래로 한가닥 양맥이 오로지 우리 동쪽에 있는데, 이제 나라가 망하고 도 또한 망했으니 원통합니다. > >엎드려 바라옵건대 모든 군자들은 우리 부자가 끼친 뜻을 공경히 생각하사 이제부터 절치부심하여 집집마다 칼을 갈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일제히 소리 질러 왜노들과 한 번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기면 4천리 선왕의 나라를 되찾고 4천 년 선성의 도를 일으킬 것이요, 지면 지하에서 선왕선현을 뵈어도 천하 만세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무궁한 사람의 도리를 세울 것입니다. > >아! 도현은 85세의 어버이를 받들고 있던 사정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세상 일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금년 7월 24일에 천년으로 세상을 떠나시니 고애자의 나이 63세입니다. 지난날에 이루지 못하였던 일을 통탄하며 장래에 다시 할 것을 맹세하나니 오는 11월 7일 동지에는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기어코 명망케 할 것입니다. 다시 바라오니 모든 군자들은 힘써 조국의 광복을 꼭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1910년 12월 22일 석양에 영해 상대산 관어대에 도착한 그는 산수암에 높이 올라가서 유시를 짓고 장손 여래와 삼종제 태현에게 큰 소리로 읽게 했다. >나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 피 온몸에 가득하도다 >중년의 열아홉 해 동안 >수염과 머리털은 추상같이 늙었구나. >나라가 망함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데 >친상에 마음이 다시 아프구나 >홀로 서 있으니 옛 산만 푸르고 >백방 헤아려도 한 가지 방책도 없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 싶은데 >이렛날에는 마땅히 양이 회복되리라 >희고 흰 저 천 길 물 속에 >이내 한 몸 족히 간직하겠구나. 그 직후, 김도현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향년 63세. 자손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날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 산수암에는 그를 기리는 '도해단'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도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녕 김씨]][[분류:조선 의병장]][[분류:영양군 출신 인물]][[분류:1852년 출생]][[분류:191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