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규(북한) (문단 편집) === 몰락: [[김동규 사건]] === 그리고 전 대외조사부 부부장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76년 6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동규가 김정일의 간부정책, 계급정책, 후계체제 확립과정의 문제에 대해 크게 비판했다고 하는 [[김동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병엽은 리용무, 류장식, 지경수, 지병학 등이 김동규의 편을 들어 김정일을 비판했으며 김일, 오진우, 최현은 김정일을 지지하였고 김일성이 최종적으로 김정일 편을 들면서 김동규가 숙청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병엽의 주장과 다르게 김동규는 1977년 4월 24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45돐 중앙보고대회에 보고자로 출석하였으며, 6월 4일, 보천보 전투 40주년 기념보고대회에서도 보고자로 출석했다. 이후 1977년 9월 말까지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77년 10월, [[폴 포트]]의 북한 방문 때도 나타났다. 그리고 리용무가 김동규의 편을 들어서 김정일을 공격했다는 주장은 리용무가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다는 여러 자료들을 볼때 신빙성이 부족한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김동규 사건]] 문서 참조. 하지만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주석에서 탈락하면서[*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 직전인 1977년 12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5기 15중전회는 조직문제를 다뤘지만 그 결과는 보도하지 않았다. 김동규가 이 전원회의에서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신변 이상 징후가 나타나더니 북한 공식매체에서 [[기록말살형|완전히 실종]],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탈락하였다. 이후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이름 한번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기록말살당했다. 김길선 기자는 북한 내부에서 김동규가 항일 빨치산인줄 알았는데 경력조사를 해보니 사실 일본 간첩이었다는 내부 문건이 회람되었다는 증언을 남긴 바가 있다. 1980년 11월, 주북 헝가리 대사관은 김동규가 1977년, 김정일의 지시로 체포되었다는 보고를 본국에 보냈다. 결론적으로 이런 정황들로 볼때 그가 숙청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1977년 [[리용무]]의 숙청 이후 김정일과 오진우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김정일이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김동규를 항일운동 변절자로 음해하는 문서를 바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동규는 숙청되어 함경북도 산골로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부주석의 위세로 지방에 내려가서도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놓고 잘 지냈는데, 1980년에 함경북도로 현지지도를 간 김일성이 혁명화를 가서는 저러고 있다고 격노하여 김동규의 저택을 폭파시킨 다음에 그를 화성수용소에 처박아버렸다고 한다. 결국 화성 16호 수용소로 끌려가서 강냉이 농사를 지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198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강명도가 들은 풍문이니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