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리 (문단 편집) == 기타 == 김동리의 고향인 [[경주시]]에서는 [[여우]]를 예수라고 하며 기독교의 [[예수]]와 동음이의어인데, 그가 이와 관련된 사건을 겪은 것이 소설 [[무녀도(소설)|무녀도]]의 [[http://www.srbsm.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533&part_idx=327|창작 배경]]이 되었다. 정치적으론 철저한 우파로 한국전쟁 때 종군작가로 활동한 적도 있으나 좌파 성향의 젊은 문인들을 차별없이 끌어안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험악한 시대에 외부에서 오는 화살을 막아주는 우산 역할을 해주었다. 서라벌예대 시절 좌익의 혈육이라는 따가운 시선 아래 여러 가지로 압박을 받고 있던 [[이문구]]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경찰]]에서 나와 이문구를 조사하려고 하면 "내 제자 보고 왜 그래?"라고 쉴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문구의 문재를 알아보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으니 여러모로 이문구에게는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다고. 이문구 자신도 일가가 참혹하게 살해된 걸 알았기에 김동리에게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문구]]의 형은 [[서북청년단]]에게 가마니로 싸져서 바다에 '''수장되었다.''' 분지 논쟁 때 작가들이 서로 간에 쉴드친 것을 보고 '''자신이 살려면 문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http://www.essaykorea.net/gnu4/bbs/board.php?bo_table=essayrev&wr_id=20&page=4|스승님의 실드]] 이문구는 해마다 설이면 빼먹지 않고 김동리를 찾아 세배를 올렸다. 평소 사람 좋기로 유명했지만 행여나 누가 김동리를 정치적으로 비난하면 정색하고 맞섰으며 일평생 보수와 진보 문인들을 상호 연결해주며 사상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와 교분을 다진 적도 있다.[* 이문구는 아래 언급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으나, 스승인 김동리가 공격받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지도부를 공격하고 탈퇴를 선언한다.] 서라벌예대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모두 등단했다는 것은 전설로 통한다. 가장 유명한 작가는 전업작가로 활동할 생각은 하지않고 교편을 잡던 [[박경리]]. 직계 제자는 아니지만 가정 주부로 지내던 [[강신재]]를 추천해 등단시켰고,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체류할 때 국졸이 최종학력으로 해병대 복무 중이었던 오유권이 가르침을 청하자 선뜻 받아들여 문학을 가르쳤다. [[이외수]] 역시 그가 1970년대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전업 소설가로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민투위 강도 사건|남민전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문인 모임에서 [[김남주(시인)|김남주]] 시인에 대해 '김남주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므로 절대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문인들의 공개 비판을 받았으며,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던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등 큰 파문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결국 문창과 교수들이 제출한 해촉 의견서가 받아들여져 1988년 9월 명예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이문열]]과 같이 보수적인 문인들과 [[김지하]]를 필두로 진보적인 문인들이 어우러져 문단계의 좌우대립이 계속 지속되었지만 차마 김동리에겐 그러지 못했다. 이념을 막론하고 이미 문단 원로였던 김동리는 제자들이 많아 위상이 높았고 그의 큰형인 전 국회의원이자 동양철학계 거두인 김범부[* 1966년 사망]의 존재감 역시 거대했기 때문에 명예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도 이미 문단 원로이기도 했던 김동리의 위치도 있고 김남주같은 경우가 워낙 특이했던지라 당시 진보적인 문인으로 이름높던 [[최인훈]]이나 [[신동엽(시인)|신동엽]], [[김수영(시인)|김수영]][* 후에 김수영의 1주기 때 [[박목월]]과 함께 추도시를 작성하고 김수영의 시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과도 큰 마찰없이 잘 지냈고 본인을 공격하며 이름을 알리기도 했던 [[이어령]]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1989년 8월 18일에 김동리, 황순원, 전숙희, 김남조 등 원로 문인 36명이 '당면한 시국을 염려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폭력혁명 세력의 선전도구 구실을 일삼고 있는 일부 목적주의 문학집단을 배격한다'고 밝히고 정치권에 대해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문익환, 황석영, 임수경, 문규현 등 일부 불순세력의 준동에 대해 시비를 분명히 가릴 것'을 촉구했다. (황석영,수인 1권, 문학동네 2017, p295) 경주 토함산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조금 빠지면 동리목월 문학관이 있다.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주당]]이었다. 생전에 사반의 십자가가 [[노벨문학상]]에 다가갔다느니 온갖 [[기레기|기자 설레발]]에 질리게 시달렸다고 한다. 본인은 노벨상 받으면 받고, 못 받으면 그만인데 어찌된 게 신문이 더 발광한다면서 불쾌하다고 생전에 치를 떨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