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두찬 (문단 편집) == 생애 == [[1919년]] [[3월 8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현 [[황해북도]] [[승호군]])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하는 등 엘리트코스를 밟았지만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첫 항일운동 경력을 남겼다. 1943년에는 겸이포제련소의 용광로 폭파계획을 세우다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병대 창설 멤버들 다수가 [[간도특설대]], [[일본 해군|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임을 상기하면, 김두찬의 항일운동 경력은 특기할만한 부분.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 시절 통위부 참위(소위)로 임관했으나 배정받았던 경리직이 마음에 들지 않자 경리직을 반납하고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하여 교육이수 과정에서 해군으로 전입하여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제주 4.3사건]]이 벌어지고 이후 해병대가 제주도 계엄임무로 투입되자, 당시 정보참모 신분이던 김두찬은 [[예비검속]] 대상자의 [[총살]]을 지시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문형순]] 서장과 같이 예비검속 학살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저항한 사례도 있었지만, 당시 해병대에 의해 주도된 예비검속으로 천 여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6.25 전쟁]]에 해병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한 상황에서는 서해 도서작전과 동해 원산만 전면의 9개 도서 점령작전을 주도하여 동해안, 서해안에서 적의 보급물자와 병력이동을 완벽히 봉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예편 후에는 대한조선공사 사장과 광복회 고문을 역임했으며 단국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80년에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 12월 30일에 별세하였으며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