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류 (문단 편집) == 생애 == 부친은 임진왜란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여 영의정에 추증된 [[김여물]]이다. 그런데 전쟁 말기에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탄핵]]되었다. [[서인]]과 [[남인]]들은 김류가 모함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북인]]들은 김류가 탄금대에서 기생들과 놀았다는게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사관]]들의 평가가 정반대인데 파직했다가 금방 복권되는 것으로 애매하게 결말이 났다. [[광해군]] 집권 시절에는 나름대로 [[관직]] 생활을 했으나 강경파 북인들에게 시달리면서 고생을 했다. 특히 광해군의 폐모(廢母)에 반대하여 [[탄핵]]받자 관직을 내던져버리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경운궁|정릉동 행궁]]에 누군가 익명으로 격문을 투서한 일이 있었는데 [[장유(조선)|장유]], 홍서봉, [[김상헌(조선)|김상헌]], 조희일 등과 함께 '삼청동 결의(三淸洞結義)'로 지목받아 위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허균]]이 꾸민 일로 밝혀져서 위험을 모면하였다. 결국 자신의 [[삼촌]]뻘 나이인 [[이귀]]와 연을 맺고 [[나라]]를 뒤집기로 합의를 본다. 1번째 계획은 실패했으나 마침내 [[인조반정]]에서는 대장으로 선임되어 놓고도 집에서 벌벌 떨고 나오지도 않아서 당황한 이귀를 포함한 반정군은 젊은 [[이괄]]에게 대장을 맡겼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도중에 나와서 "내가 대장이니 빠지라"고 했고 이것 때문에 반발한 이괄과 싸웠으나 이귀의 중재로 멈췄다. 하지만 반정이 성공한 이후에는 이괄이 반정 당일에 용감히 싸워 공을 세웠다고 후대하였다.[* 김류가 이괄에게 앙심을 품고 논공행상에서 낮게 책정했다는 이야기는 야사를 통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실제로는 몇 번이나 이괄의 공을 추켜세웠다. 논란 문단의 '이괄을 푸대접했다?' 문단 참고.] 한편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막나가는 성격으로 유명한 이귀와 김류, 신경진, 심명세 등은 [[남인]]을 정계에 참여시키면서, [[북인]] 처벌 문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시기의 정책에 반대하며,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간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광해군 반대파 북인들은 살려주었지만,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 세력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토벌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그래서 이때 [[이이첨]], [[정인홍]], 류희분을 비롯해서 북인 실력자들이 '''역적 토벌'''이라는 이유로 정적이 되며, 친족들을 싸그리 처형하거나 폐서인시켜 농민, 상인, 어민과 다를 바가 없는 상민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졌다.[* [[박승종]]은 의병 모집을 시도했지만 이미 궁궐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아들 박자흥과 함께 음독자살한다.] [[기자헌]]과 [[유몽인]]은 온건파라 그런지 반정 당시에는 살았지만 유몽인은 유응형이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해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기자헌 역시 이괄의 난이 터지자 사사당했다. 이무렵 논공 행상은 젊은 시절부터 명문 자제로서 오만한 기록이 많았던 이괄의 불만을 높여서, 인조 재위 초장부터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결국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기자헌을 포함 한 북인 정치범 38명이 이괄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이유로 연루가 되어서 옥에 가뒀다. 이때 북인 38명에 대해 조정에서는 처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귀는 의견을 반대하고 그들을 국문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죽이거나 귀양보내자고 주장했으며, 김류는 바로 처형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때마침 이괄의 반군이 우세에 들어가고, 정부군이 열세에 들어가자, [[인조]]와 [[삼정승]]은 서로 의논하면서 결과적으로 김류의 의견이 채택되고 기자헌은 사사되고 나머지 북인 정치범 37명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서인과 연합하고 있었던 남인 출신 영의정 이원익도 피난지에서 탄식했을 정도였다. 이 탓에 민심만 괜히 악화되어서 결국에는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이괄의 인기가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이이첨, 기자헌, 정인홍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을 광해군과 통한 내통자로 여기며, [[대북]]과 [[소북]]을 가리지 않고 숙청한 행위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물론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정권도 마찬가지로 광해군의 옥사와 궁궐 공사를 도우면서 그로 인해 욕을 먹고 광해군 정권의 입지를 크게 훼손한 것이 반정으로 몰락시킨 것에 대해서는 자업자득이다.] 이러한 [[서인]]과 [[남인]]의 북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숙청 작업은 피해자인 북인한테서는 명분없는 처벌이라며 비난해서 민심이 뒤숭숭해지고, 오히려 북인들은 반발하면서 반역을 준비했다.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 등 북인 세력들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거사를 준비했으나 이내에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들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 된 정한추대사건[*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등을 꾸몄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서 명분이 있으나 민심이 안 좋아진 북인 숙청은 위급시에 이렇게 가벼운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당시 서인과 남인 정권의 한계였다. 인조에게 [[사랑]]받은 서인의 [[얼굴마담]]이었는데 애초에 [[인조|능양군]]이던 인조를 왕의 재목으로 추천한 사람이 김류였다. 하지만 평시의 잡일에는 능할지언정 [[병자호란|급박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옹졸하고 무능했다. 말년에는 [[영의정]]이 되어서 정국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으며 심기원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는 내용이 퍼져 있는데 사실은 심기원을 죽인 사람은 [[김자점]]이고 김류는 별달리 심기원 토벌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김류는 서인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인물이다. 노년에는 온 조정이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미는 가운데 김자점과 둘이서 [[효종(조선)|봉림대군]]을 인조의 [[조선/왕사|후사]]로 밀었으며 봉림대군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김류의 안목은 옳았다. 비록 인조의 뜻에 따라 김자점과 함께 영합해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찬성하기는 했으나 [[민회빈 강씨|강빈]][* 소현세자의 부인. 시아버지 인조의 수라상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사되는데 훗날 민회빈(敏懷嬪)으로 추증.]의 사사에는 끝까지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는 등 꾸준히 신념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죽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류의 업적으로 1.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것, 2. 조정의 중신으로서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한 것, 3. [[정원군]] 추숭과 강빈 사사에 반대한 것을 들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동시에 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통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병자호란]] 때 [[김경징]]을 강도검찰사[* 지금의 [[군대]] 직책으로 비유하자면 [[강화도]]를 지키는 지역방위사령관인 셈이다.]에 임명할 것을 강요한데 대해 통분스럽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극렬하게 비판했다. >전 영의정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졸(卒)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략) > >김류는 근엄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起鞠)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인조반정|계해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문형(文衡)을 맡았고 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정원군|추숭(追崇)]]과 [[민회빈 강씨|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효종(조선)|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병자호란|정축년과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김경징|패자(敗子)]]에게 [[강화도 방어전|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痛憤)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3105_001|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윤3월 5일 경오 1번째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