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류/평가 (문단 편집) ==== 군사적 무능 ==== 평시의 업무 능력은 그래도 '''중간은''' 가는 수준이었으나, 전쟁이나 전투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인조반정 당시 계획이 누설되자, 한시가 급한 상황에 대장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찌질한 모습을 보였다.[* 실록에는, 거사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차피 망한 거, 나 잡으러 올 놈이라도 죽인다.’는 비장한 생각을 품고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심지원과 원두표가 찾아오고 밖으로 나섰다는 기록이나 병자호란 당시의 무능한 모습을 합쳐 생각해볼 때, 그저 혼란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괄이 대장으로 추대되어 거사를 주도했고, 김류는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와 설득한 끝에야 밖으로 나서 반정에 합류했다. 겁이 나서 숨어있던 주제에 이괄한테 대장 노릇을 하려 들어서 싸움이 붙은 것은 덤이다. >(전략)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변란을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병자호란 때도 그의 무능함은 여전했다. 청군이 양철평(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까지 왔기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놓고, 뜬금없이 “과천과 금천을 경유하여 강도(강화도)로 이동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적이 이미 지척까지 와 있고, 어디에 얼마만큼의 병력이 위치하는지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당연히 삼사는 극력 반대했지만, 인조는 김류의 말대로 새벽에 바로 성을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보라가 심해서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그 뒤로도 김류는 강화도로 가자는 발언만 되풀이했다. 심지어는 “대신 십여 명만 데리고 충원(忠原)이나 영호남으로 피하자.” “야습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자.” “극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은밀히 적진을 가로질러 가자.” 같은 말까지 꺼냈다.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저 요행수만 바라는 졸장의 전형이란, 김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전략)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중략)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 >"고립된 성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입니다. 강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또 저 적은 뜻이 상국(上國)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강도로 가시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 >하니, 상이 이어 김류의 귀에 대고 하문하기를, >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 >하자,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 >"경기(輕騎)로 금천과 과천의 들을 가로질러 가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 >하였다. 삼사가 모두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어가를 옮길 계획을 정하니, 하룻밤 사이에 성 안이 온통 들끓었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3번째 기사]]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5_001|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 >(전략) 김류와 성구(병조판서 이성구)가 여러 차례 강도로 어가를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5_004|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4번째 기사]]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중략) 김류 등이 아뢰기를, >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훈구(勳舊) 십여 명을 데리고 미복 차림으로 동문을 나가 곧장 충원(忠原)으로 향하거나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7_002|인조 14년 12월 17일 정해 2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대답하기를,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니, 좋은 계책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복(微服) 차림으로 나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지금 만약 군사를 뽑아 습격을 한다면 비록 차질이 있을 듯하지만, 만약 한 면을 유인하여 죽이고 돌아갈 길을 연 다음 날랜 말을 타고 달려 나간다면 약간의 요행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신이 포수를 보내어 야습하게 한다면, 이왕자(二王子)의 군영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공격이 아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고, 고립된 성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비록 굳게 지키려고 하더라도 마초(馬草)와 군량도 부족하니 어찌합니까? 옛날에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단기(單騎)로 적지(敵地)에서 도망쳐 나와서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지금의 상황도 이러한 방법 이외에는 달리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장사를 뽑아서 좌우에서 호위하면서 날랜 말로 달려 나간다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한데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12A_17A_00140_2013_036_XML|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12월 17일(정해) 맑음]] 인조 14년 12월 29일에는 남한산성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치고는 청군에 싸움을 걸었다. 적이 응전하지 않자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다 후퇴했는데, 그때 역으로 기습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다. 수성전에서 적을 공격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은, 야습과 같은 빈틈을 노린 기습이다. 적을 도발하여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공성하는 쪽이 행하는 전술이다. 또한 청군은 기병이 주력이며, 기병은 평원에서의 전투에 강하다. 그런데 김류는 대낮에 평지로 병력을 이동시켜서는, 당당하게 적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야말로 범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격이다. 일부러 져주려던 건가 의심까지 든다. 오죽하면 인조조차도 “기병을 상대로 왜 평지로 내려갔느냐.”고 지적하며 넌지시 김류를 꾸짖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 건, 이때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섰지만, 김류는 성 위에서 지켜보며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이, 부하 장병들만 사지로 몰아넣고, 자기는 안전한 곳에서 혓바닥만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휘관은, 사망할 경우 지휘 체계가 무너져 군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최전선보다는 후방에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냥 뒤로 빠진 것도 아니고 아예 성에서 나오지도 않은 것은, 원활한 지휘를 위한 조처가 아니라, 자기 몸 하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보신책으로밖엔 볼 수 없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29_003|인조 14년 12월 29일 기해 3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30_002|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2번째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