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류/평가 (문단 편집) ===== [[이괄의 난]] 당시의 행보 ===== 이괄의 난 당시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김류는 이괄을 옹호하며 고변을 부정했다.[* 실록에 김류가 직접적으로 어떤 발언을 했다는 식의 기록은 없다. 다만 "반란 고변이 있을 적에, 김류는 이괄을 두둔했다."는 양사의 간언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김류가 이괄을 옹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12011_001|#]]] 그러나 그 이괄이 정말로 [[이괄의 난|반란]]을 일으키자, 입장을 급선회하여 고변에 언급된 사람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처음부터 시종일관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이귀]]조차도 "일단 국문하여 사실부터 밝히자."고 반대했지만, 김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실 이괄을 옹호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국문에 참여한 추관들조차도 무고(誣告)가 의심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변자 중 한 명인 문회는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9008_003|이후에 또 역모를 고변했는데,]] 공을 얻기 위해 무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9013_002|절도에 정배되었다.]] 공신이 되기 위해 고변을 남발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변에서 역도로 거론된 인물 중에는,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분투했던 정충신도 있었다.''' 고변에 연루된 이들을 몇날며칠에 걸쳐 국문했지만, 억울하다는 말만 무성했으며 오히려 도중에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거나 혹은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2-CAB-1101&callType=srch&dataID=018@AKS-2012-CAB-1101_DES|#]][[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2_002|#]] 상황이 이러니, 추관들은 무고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역으로 '고변자들을 처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귀의 반대로 고변자들은 죽음을 면했지만,([[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357A_0010_000_0030_2004_015_XML|... 그때 추관이 무고라고 여겨서 고변한 자 한흔을 죽이고, 또 문회와 이우 등을 아울러 죽여서 옥사를 뒤집을 계획을 하려고 했다. 공(이귀)이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탑전에서 힘껏 아뢰어 죽이지를 못했다. ...]]) 감옥에 갇히는 신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괄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 연후에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5_006|석방되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 역시, 고변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이괄의 아들 이전을 잡아들이려 했고, 그 이유는 당연히 역모에 대한 조사였다. 이괄로서는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역적인데, 그 아비가 무사할 리 없지 않은가.'''] 또한 이괄이 병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해오고 있던 상황이어서, 누가 역적이고 누가 누명을 쓴 사람인지 세심하게 판별할 여유도 없었다. 연루자들에 대한 이귀의 신중론이 무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관련자를 전부 죽인다.'는 김류의 선택지 역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류는 "이들이 내응하여 이괄을 도와 서울에서 난리가 터지면 어쩔 것이냐."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억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이괄과 소통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도성에는 이괄의 공세를 막아낼 전력이 없어서 어차피 피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적 처형은 핑계였을 뿐, 김류는 단지 이괄을 두둔한 전적 때문에 자신도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 강경론을 펼친 것에 불과했다. 이는 반란을 진압한 후 이귀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을 신리(申理)[* 억울한 사람을 위해 변명해주다.]해달라."는 차자를 올리자, 김류 또한 동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기자헌(奇自獻)에게 사약을 내리고, (중략) 37인을 참(斬)하였다. (중략) 좌찬성 이귀(李貴)는 국문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논죄하여 죽이고 귀양보내려 하였으나, 판의금(判義禁) 김류(金瑬)는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안팎이 체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대신·추관이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면 방어하는 방책을 어느 겨를에 규획(規劃)하겠는가. 곧 죽여 없애야 한다.’ 하였는데, 대개 신경진(申景禛)·심명세(沈命世) 등이 힘껏 권하고 문사랑(問事郞) 등 여러 사람도 대부분 도왔기 때문이다. 김류가 드디어 들어가 상에게 청하였는데 삼공(三公)도 이론이 없으므로, 상이 드디어 따른 것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5_005|인조 2년 1월 25일 경진 5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38인이 일시에 형벌을 받은 원통함을 신리(伸理)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때 역적의 공초에 내응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반역의 보고가 곧바로 이르렀으므로 인심이 황혹되어 그날 밤에 안에서 난이 일어나는 변이 있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흠이 신 및 두세 훈신과 함께 서로 의논하여 청대(請對)해서 일시에 처단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찌 옥석이 함께 탄 잘못이 없겠습니까. 만약 분명하게 분변할 수 있다면 인심이 반드시 통쾌하게 여길 것이니 이는 바로 좋은 일입니다." >(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10018_001|인조 3년 10월 18일 계사 1번째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