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명원 (문단 편집) == 생애 == [[임진왜란]] 이전에는 권신 이량을 형 김경원과 함께 탄핵하다가 파직된 경력도 있을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마무리지은 명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군사 요충지의 지방관을 섭렵하고 [[니탕개의 난]]과 이어지는 [[여진족]]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 과정에서 뛰어난 군사 행정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와중에는 [[도원수]]직을 맡았으나, 전투에는 서툴렀던데다 임란 초기 도원수직의 제한된 권한까지 곁들어져 이전의 명성에 상당히 누가 되는 행동거지를 보였다. 부연하자면 도원수가 군에 있어서 포괄적인 총지휘권을 부여받은 건 [[권율]]이 올라선 직후이다. 김명원 시절에는 김명원보다 관직 경력이 높은 전직 정승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 1품급 산직을 가진 부원군, 군들이 넘쳐났...(...) 게다가 조선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체찰사]]가 4명이나 되어 도원수의 권한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를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 비유해 본다면, 합동참모의장이 군령권을 행사하려 하는데 [[국무총리]], [[부총리]], [[국가안보실장]], [[국방위원장]] 등 온갖 사람들이 참견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방패막이 되주고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국방장관]]이 4명이라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혼란만 가중되는 상황이다.] 제대로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고, 그 결과 제한된 권한만을 행사했다. 실제로 [[비변사]]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니 왜 이렇게 부하 장수들 통제를 못 해?!'''였다. [[사관]] 평도 '사람됨이 너무 유순해서 장수감은 아니었더라'였고. 그러나 평양성 전투때 평북 지역에서 2만여에 달하는 군사를 양성했고, 한양 탈환쯤에 경기도 일대에서 일제 징발을 통해 수천의 병력을 재차 끌어모으는데 성공하는 등 군사 행정에선 매우 탁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