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명원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이전 === 1568년 함경도 순무 어사에 임명되었고, 1569년 종성 부사가 되었다. 이후 동래 부사, 충청 감사, 의주 목사, 평안도 병마 절도사, 전라 감사 등 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외직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관직 경력을 통해 김명원은 '무재(武才)가 있는 데다 변방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만약에 사변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직시키면 매우 편리할 것'[* 선조 실록 16년 3월 4일자 기사]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한 전라 감사직을 맡을 당시 자신의 후임으로 심의겸을 추천했는데 이 일로 인해 동인으로 여겨지면서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병조 참판으로 그 자리를 유지했다. 1583년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함경도 지역 여진족과 지속적이고 대규모의 군사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김명원을 함경도 관찰사로 파견(1584년)하였고, 김명원은 이 자리에서 병력 동원, 물자 공급, 백성 원호 등 군사 행정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좌참찬(左參贊) 겸 도순찰사(都巡察使)직으로 올라가 사실상 북변의 군사 행정 및 감찰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며 유력한 중신이자 군사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직을 거친 후 중앙으로 복귀하여 15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직을 겸하고, 1588년에는 형조 판서직을 역임. 1589년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기축 옥사를 수습하여 정국을 안정화시키고 그 공으로 평난 공신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에 봉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