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명원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시기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었고, 4월 29일에 도원수직에 오른다.[* 유도대장 이양원, 부원수 [[신각]]] 이는 시기로 볼 때 전방으로 나간 [[이일]]과 [[신립]]의 뒤를 받치는 군사 행정을 수행하고 최고 사령관 격인 도제찰사 [[류성룡]]을 서포트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원수직에 임명되기 하루 전인 4월 28일에 [[탄금대 전투]]가 일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한발 늦은 인사였다. 탄금대 전투 소식이 들려온 후 조정은 파천 준비에 들어가고, 또한 패전 소식이 한성에 퍼지면서 공황 상태에 빠져 군사들까지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던 것. 다음 방어선 구축이 임진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명원은 한양에 주둔하면서 한강 유역의 방어선을 지키고 적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는다.[* 본래는 [[류성룡]]이 지휘권을 잡아야 했으나 이항복의 건의로 류성룡은 조정과 함께 철수.] 문제는, 이때 김명원의 병력은 1천여 명, 밀려오는 적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총원 2만 2천 8백여 명), 또한 남한강을 도하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도 다른 길로 접근해 오고 있었단 거다(총원 1만 8천 7백여 명). 거기다 김명원 다음가는 지휘권을 지닌 이양원은 임란 바로 직전까지 우의정을 역임할 정도의 거물로, 관직 경력으로 따지면 3정승 직을 한번도 맡은 적이 없었던 김명원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사람이어서 김명원이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답이 없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 시간벌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결국 접근한 일본군 몇몇이 한성 남쪽 언덕에서 한강을 도하하려는 시늉을 보이자 군을 물리려다가 군이 붕괴, 간신히 병력을 추스려 임진강으로 향한다. 김명원의 [[흑역사]]라면 흑역사일 수 있는 [[신각]] 사건의 문제는 이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다. 조선 측이 작정하고 구축한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곳으로 도착한 것은 김명원이 이끄는 군대 뿐이었고 이양원과 신각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양원과 신각은 [[경기도]] [[양주시|양주]]로 철수해 군을 수습했는데, 하필이면 파천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경기도 지역의 소식이 잠시 두절된 상태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장계도 안올라왔다. 패전을 거듭한 [[이일]]도 장계를 꾸준히 올렸고, [[이순신|충무공]]은 심지어 장계만이 아니라 파천한 임금이 먹고 지낼 식량과 물품까지 올려보냈는데... 결국 임진강으로 철수한 김명원은 자신과 연락이 두절된 신각에 대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라는 장계를 올려버렸고,[* 도원수로서 모든 상황에 대해 조정에 보고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임진강 유역과 가까운 [[개성시|개성]]의 조정에서는 이를 받고는 '''적전 도주'''로 판단하고 신각을 참하라는 명령을 선전관에게 들려 경기도로 파견한다. 그리고, 나중에야 경기도에서 올라온 소식은 해유령 근처에서 신각이 수습한 병력으로 적을 격파했다는 승전보였고, 선조는 급하게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사실 신각은 부원수였으므로 유도대장 이양원이 아니라 도원수 김명원의 통제를 받는게 당연했고, 김명원에게 별도의 보고도 없이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간건 잘못한 일이 맞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와중에 휘하 부원수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다음 집결지인 임진강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김명원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어쨌든 김명원은 이후 8도 도원수로 승진해 1만 5천의 병력으로 [[임진강 전투#s-1]]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그런데 문제가... 비변사에서 '아니 한성이 함락됐는데 김명원 저거 가만히 앉아서 수비만 하네요. 부원수라는 신각도 통제 못하고[* 신각이 참형을 당한 것은 임진강 전투 이후이다(임진강 전투가 일어난 바로 그날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신각 그거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대로 (처형)하겠습니다'는 건의를 하고 있다. 선조 실록 25년 5월 18일 참조). 즉 임진강 전투 당시 김명원이 신각을 죽인 일로 군심을 잃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사실 왜곡의 극치.'''] 뭐하나요 저거. '''도순찰사 한응인에게 독자 지휘권을 주고 공격을 맡겨서''' 나가 싸우라 하세요.'라고 건의하면서 지휘권이 분열되어 버리고, 결국 그 결과 5월 17일 저녁에 야습을 시도했던 한응인이 유인책에 빠져 적을 추적했다가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군이 붕괴하자 거기에 김명원이 지휘하던 부대까지 휩쓸리면서 참패. 김명원은 공격에 반대했으나 결국 지휘권이 없었기에 설득에 실패하여 여기서 다시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원수인 [[신각]]과 헤어지게 되고 김면원은 이를 빌미로 신각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장계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이 장계를 읽고난 뒤에 신각이 [[군무이탈]]했다고 지레 짐작하고 신각에게 [[망나니|도부수]]를 파견했으나 [[신각]]은 되려 [[해유령 전투]]에서 왜군과 싸워 이기고 왜군의 수급 다수를 올려보낸 상황이었다. 이에 [[선조(조선)|선조]]는 [[신각]]의 [[참수형]] 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하게 선전관을 파견했으나 선전관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신각]]의 [[참수형]]이 집행된 이후였다. 이후 [[윤두수]], [[이원익]]과 함께 평양성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다시 윤두수와 함께 야습을 걸었다가 역습에 패배. 이때 대동강의 도하 요충지까지 알려주는 실수를 해 버리면서 결국 평양성도 내어주고 철수한다.[* 윤두수와 김명원이 야습을 시도해 성공하긴 했다. 문제는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는 일본군을 뿌리치고 빠져 나올 때 겁먹은 사공들이 군사들이 배에 타기도 전에 먼저 내빼버린 것. 야습에 동원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대동강의 얕은 부분을 건너 빠져나와야 했는데 추격한 일본군이 이를 알아버렸다. 일본군이 공세가 시작될 참에 어떤 말 탄 사람이 도망치는걸 보고 누군가 "김명원이 도망친다!"라고 외쳤고 그 결과 군심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윤두수와 김명원은 노약자들을 대피시키고, 병기를 파쇄한 다음 부랴부랴 평양을 빠져나왔다.] 이후 이원익과 협력하여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서 순안에 주둔하여 재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일본군은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다. 애초에 전력차가 컸기에 평양성 함락을 예상하고 순안에 본영을 설치할 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순안에 주둔할 적에 평북의 지형이 험해서 더이상 일본군이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되자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평북에서 1만의 군대를 양성하는 등 조선군 재건에 노력하였다. 1593년 명나라 원병이 1차로 파견(부총병 [[조승훈]]과 3천여 명)되어 평양성 탈환을 시도하나 실패(2차 평양성 전투)하자 조선 측에서는 '중국 군대만 기다릴 순 없잖아? 우리 힘으로 탈환해 보자고' 하는 생각에 그동안 재건한 2만여 병력을 평양성으로 움직여 탈환을 시도했고, 여기서도 최종적인 지휘권을 잡았으나(3차 평양성 전투) 다시 실패. [[행주대첩]]으로 [[권율]]이 주목받게 되자 선조는 도원수를 김명원에서 권율로 교체하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벽제관 전투]] 이후 명의 강화 교섭 시도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반대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도체찰사 류성룡과 도원수 김명원에 대한 불만, 그리고 뛰어난 전적을 올린 권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권율이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릅니다. 함부로 바꿨다가 혼란스러워지면 좀 문제니까 일단은 놔두죠."하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결국 도원수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의병의 절제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후에 비변사에서 '류성룡은 놔두고 김명원만 권율로 바꿉시다'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으나 거부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군사 행정과 작전 구상에 노력하였으며, 평양성 함락 이후에 경기 지역과 한양 탈환을 위한 병력 배치와 행정은 김명원, 류성룡, [[이항복]]이 작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이 그의 군사적 식견을 높게 평가하여 자문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철수한 후에도 교체 논의는 지속되었고, 6월에 권율은 김명원을 대신해 도원수가 된다. 이후에는 호조 판서, 예조 판서, 형조 판서, 공조 판서를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