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명원 (문단 편집) === 정유재란과 종전 이후 ===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병조 판서로 유도 대장을 겸했고, 이후 형조 판서로 옮겨간다. 병조 판서를 이어받은 [[이항복]]과는 당파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인지 정유재란 시기에 둘은 같이 묶여서 관직을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귀시키도록 건의한 당사자도 김명원과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이 영의정으로 올라갈 적에는 우의정으로 김명원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이후 좌의정으로 보직 이동하였다. 이순신을 탄핵할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중립을 지킨 몇 안되는 중신이었다.[* 정탁은 그 유명한 신구차를 올리며 이순신에게 죄가 있을 순 있으나 전쟁터에서 장수를 죽인다면 손해만 볼 것이라며 적극 변호했고, 이원익은 김명원과 더불어 일단 지켜보자는 비교적 이순신에 우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이원익과 정탁과의 비교는 대놓고 옹호한 것(정탁)과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긍정적이었던(이원익) 차이였지만 사실상 이원익도 이순신 편을 들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신을 빼고 보면 이순신의 부하들과 권율이 이순신을 옹호하고 있었다. 추가로 [[이정암]]의 동생 이정형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했으나, 당시 종 2품 이조참판이라는 다소 낮은(?) 벼슬 때문에 묻혀버렸다.] 당시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던 선조를 향해 이순신의 친구이자 그를 천거한 [[류성룡]]까지 선조의 분노에 눈치를 보며 이순신 탄핵에 찬성했던 상황이었고, 남인, 북인 할 거 없이 동조하고 언관들조차 건수잡았다고 신나서 실컷 물어 뜯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보여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명원이 이순신 탄핵 사건에 중립을 지킨 이유는 이전에 신각 건으로 낭패를 봤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내지는 그 사건을 방패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직언을 질렀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여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이항복]]과 더불어 이순신의 복직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때 선조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암묵적으로 재가는 했으나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하기는 민망하고 화가 났는지 일어나 나가버렸다. 1601년에는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나 다음해에 병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