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법린 (문단 편집) == 생애 == 1899년 8월 23일 [[경상북도]] [[영천시|신녕군]] 치산면 치산리(現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에서 아버지 김정택(金玎宅)[* 족보명 김형상(金炯相).]과 어머니 김악이(金岳伊)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9011&docId=3577316&categoryId=59011|태어났다]]. 신녕공립보통학교(現 신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되던 1913년 [[영천군]] [[은해사]]에서 양혼허(楊渾虛)를 은사로 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범산(梵山)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이듬해인 1915년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청룡동(부산)|청룡리]](現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부산)|청룡동]]) 546번지 [[범어사]]의 [[금정중학교(부산)|사립명정학교]](現 [[금정중학교(부산)|부산 금정중학교]]) 보습과에 입학해 이곳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3701|본적을 두었고]], 1년 과정을 마친 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40번지 [[https://naver.me/FVcDm6Xw|선학원]](禪學院)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751|거주하면서]]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18년 불교중앙학림(現 [[동국대학교]])으로 편입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전에 범어사 대표의 자격으로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에서 [[한용운]]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고, 3월 4일 그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뒤 범어사로 돌아와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이에 3월 18일 동래군 동래면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킨 뒤 [[일본 제국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그해 4월, 불교중앙학림 산하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되었던 항일 비밀결사로 [[백초월]]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했다.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중화민국]] [[상하이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길림성]]·[[봉천성]]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해 국외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기도 했다.] 대표 자격으로 파견되는 것을 구실로 해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망명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했다. 이어 임시정부 국내 파견원의 자격을 얻어 1919년 5월 다시 귀국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소식을 조선 각지에 전달하기 위해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해 경기도 경성부를 비롯한 각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김대용(金大鎔)과 함께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단둥시|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전싱구(振興區) 류다오거우(六道溝).]에 동광(東光)상점을 가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했고, 상해에 파견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272|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白性郁), 국내에 남아 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5|김상헌]](金祥憲)[* 金'''{{{+1 尙}}}'''憲이라고도 표기한다.]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비밀결사인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창설할 것을 계획하고 귀국했고, 자금조달 및 조선 내 유력 승려 모집, 선언서 및 의용승군 헌제(憲制) 작성 등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동지가 검거되는 바람에 다시 중화민국 상해로 망명했다. 1923년 11월 6일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문학부 [[철학과]]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5031517024735|입학해]] 일반 [[철학]]과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근대 철학사, [[논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751|공부했고]], 재학 시절이던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Egmont Palace)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이미륵]]·[[이극로]]·황우일(黃祐日)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파견돼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단 앞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3.1 운동 당시의 [[기미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일제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는 결의안을 발표하는 등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905031113364515|활약했다]].[* 당시 연설문의 전문은 한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독립유공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996|조현균]](趙賢均)의 현손이자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2006년 11월 [[독일]] [[브레멘]]의 한 고서점에서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의 [[독일어]] 단행본을 발견했다.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 '킨파린의 연설문(texte de discours de Kin Fa Lin, 연설문 제목 -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이라는 연설문 전문을 발견해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905031113364515|2019년 5월 7일 한국일보 기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연설문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위 기사 참조.]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법린(1927년).jpg|width=100%]]}}} || ||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일본공산당]] 공동 창립자이다.], [[이미륵]], [[이극로]]. || 이후 소르본 대학교 졸업 후 1928년 초 귀국했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했고,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5월에는 한용운의 지도하에 조은택·박창두·[[최범술]] 등과 함께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해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고 정치체제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비밀투쟁을 전개했으며, 이후 [[도쿄도]]에도 지부를 창설하자 도쿄도 지부 책임을 맡았다. 이후 범어사 [[금정중학교(부산)|금정불교전문강원]]의 원감에 취임했으나 1938년 말 만당의 조직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돼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일본 제국 경찰에 재차 체포되었고, 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등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간 수감되었다. 이때 원감으로 있던 금정불교전문강원은 폐원당했다. 이후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었고 고시위원장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불교교무원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선공화당 [[김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10월 30일 [[https://www.moe.go.kr/mnstrHistory.do|제3대]] [[교육부장관|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초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에 [[https://www.unesco.or.kr/introduce/way/|취임했다]]. 그러나 재임 중이던 1953년 당시 [[이승만]]이 주창하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808|한글 간소화 방안]]에 대해 반대해 파문이 일면서 이로 인해 1954년 4월 20일에 사임하였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자유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조일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사장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8052500329203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8-05-25&officeId=00032&pageNo=3&printNo=3984&publishType=00020|역임했고]], 1959년 1월 21일에는 초대 원자력원장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0122002091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1-22&officeId=00020&pageNo=3&printNo=11248&publishType=00010|임명되었다]]. 1963년 7월부터 1964년 3월까지 [[https://www.dongguk.edu/page/63|제4대]]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총장 재임 중이던 [[1964년]] [[3월 14일]] 밤 9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 1-31번지 자택에서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4031600209207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3-16&officeId=00020&pageNo=7&printNo=13042&publishType=00020|사망하였다]]. 향년 64세.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