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병하(북한) (문단 편집) === 몰락 === 1982년 7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제외되면서 남한에서도 숙청설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말들이 중구난방으로 돌고 있다. 보위부 지도원 출신 탈북자 윤대일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 초에 무고한 군중을 죽여 당과 인민을 이탈시켰다는 이유로 숙청당하였고 1981년 국가정치보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6개월 간 보위부 부부장, 국장 전원이 제거되었고 김병하의 각종 비리를 핑계삼아 관련 인물들이 철저히 숙청당했다고 한다. 2020년 6월호 월간조선 기사 역시 김병하가 지나친 숙청으로 사나워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 죽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2002100047|있다.]] 박병엽 역시 김병하가 1970년대에 원성의 대상이 된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숙청했다고 주장했다. 김영순은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 김병하가 보위부 간부초대소로 여자들을 끌고와서 강간한 후에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여자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걸리는 바람에 당 위에서 놀아난 놈이라고 김일성의 지시로 3대 죄다 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자살했다고 적었다. [[고영환]]은 1982년 1월에 김병하가 방탕한 생활을 해온 이유로 숙청당했다는 방송을 들었다고 증언하였으며 1990년 7월, 국가보위부원 한성용과 대화하면서 김병하가 진짜로 숙청된 이유는 곁가지를 철저히 봉쇄하라는 김정일 지시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김현식 역시 비슷한 증언을 하는데, 김정일이 김병하에게 곁가지들과의 투쟁을 왜 제대로 하지 않냐고 비판하자 김병하가 그건 조직지도부 10호실의 업무 아니냐면서 보위부가 어떻게 대놓고 [[김성애]]에게 각을 세우겠냐고 난색을 표했고 이에 김정일이 1981년에 김병하의 여성편력을 구실로 김병하 일가 전원을 자신의 친위대인 호위사령부 제2호위부로 연행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렸다고 설명했다. 강명도 역시 곁가지 문제를 이유로 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김병하의 아들 김창하가 [[김평일]]과 어울리며 김평일 만세까지 외쳤다고 하는데, 김병하는 혹시 김평일이 승계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보위부의 원로간부 15명이 김병하의 비리를 연명으로 김정일에게 고발하는 소위 15인 사건이 벌어졌다. 김정일은 김병하에게 앞으로 주의하라고 투서가 날라왔음을 알려주었고, 김병하는 즉시 15명의 간부들을 모두 14호 수용소에 처박아 총살하려 했으나, 그 중 한명이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호위총국 산하 평성여단 정치위원으로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김병하의 소행을 고발하였다. 결국 김정일의 지시로 보위부원 전원이 집합한 가운데 김정일 친위부대가 보위부를 포위하였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치구]]가 주도한 혹독한 검열 끝에 김병하는 검토 3일 만에 어차피 죽을 것을 직감하고 자살해버렸다고 한다. 위에 인용된 백명규의 증언에도 김병하는 검열이 여자문제까지 파고들자 권총자살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만 백명규는 1984년 3월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이미 탈락했던 걸 보면 그 전에 숙청된 것이 맞다고 판단된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김병하가 사라진 이후 [[리진수]]가 1984년 국가안전보위부장으로 부임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1985년부터 김병하를 숙청된 인물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