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사행 (문단 편집) == 생애 및 활동사항 == || [[https://books.google.co.kr/books?id=tcarDwAAQBAJ&pg=PT277&lpg=PT277&dq=%E5%BF%BD%E8%B5%A4%E6%88%BF%E6%B4%9E&source=bl&ots=ySycXgcnsD&sig=ACfU3U3o2L6RMb8Rf0jGqIOKRFIxaPgtMw&hl=ko&sa=X&ved=2ahUKEwjy_IqN4q_lAhUQfXAKHb75CtEQ6AEwAHoECAkQAQ#v=onepage&q=%E5%BF%BD%E8%B5%A4%E6%88%BF%E6%B4%9E&f=false|'''태종 12년 임진년 5월 후주 6''']] || || 초명은 김광대(金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1357년( 공민왕 6) 왕의 뜻을 좇아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켜 많은 재력을 소모하였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익주[* 익산의 고려시대 명칭]의 관노가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 3)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고려 시대에 둔, 내시부의 으뜸 벼슬. 공민왕 11년(1362)에 내상시를 고친 것으로 품계는 정2품이다.]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려는 왕에게 경연에 하루 참석하지 않아도 정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에 [[태조(조선)|태조]]의 명을 따라 [[http://luckcrow.egloos.com/v/2525842|팔각전]]을 보수하였으며, 이 해 7월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2년부터 1395년까지 조선 창건에 기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들에게 공신의 봉작을 내리며 하사한 녹권.]에 녹훈되었다. 1394년(태조 3) 왕명에 따라 홀치방동(忽赤房洞)에 내구(內廐)를 지었으며, 1397년에 판경흥부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사복사농선공감사(判慶興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司僕司農繕工監事)가 되고 가락백(駕洛伯)[* 귀족작호]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문묘조성제조(文廟造成提調)가 되었다. 이 해 12월에는 겸판사헌부사(兼判司憲府事)로 수충보리공신(輸忠輔理功臣)에 녹훈되었으며,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삼군부|삼군부(三軍府)]]의 문에 효수[*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형]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