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산 (문단 편집) === 중국에서의 활동 ===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 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한다. 1925년 7월 광저우로 가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 민족 연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는다. 1927년 하이루펑에서 [[펑파이]]가 폭동을 일으키고 하이루펑 소비에트를 건설하자 동참하였다. 펑파이가 칠살령을 발표하며 학살을 선동하자 지주들을 학살하는 [[인민재판]]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어 공산당 북부 지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38년 [[캉성]]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여기엔 [[민생단 사건]]도 영향을 주었다.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임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