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만(언론인) (문단 편집) == 생애 == 1910년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방 줄래리(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에서 [[김성수(1891)|인촌 김성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서울특별시]] [[중앙고등학교]])(21회), [[일본]] [[주오대학]] 예과, [[영국]] [[런던 대학교 그룹]] 소속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수료. 졸업은 하지 않았다.] 이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고로 부친과는 와세다대학 동문이 된다. 1949년 [[동아일보]] [[이사(직위)|이사]]로 언론계에 몸담았다. 인촌이 세상을 떠난 후, 외사촌형 심강 [[고재욱(언론인)|고재욱]][* 1903~1976. 인촌 김성수의 처조카이다. 그의 본처 고광석의 친정 오빠인 고광준의 아들.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장덕수]]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 혼란한 [[동아일보]]를 잘 수습했다.]과 상의하여 회사를 경영해 나갔다. 1963년 4월 25일에는 [[동아방송]]을 개국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부사장 겸 발행인으로 재임 중 1968년 [[신동아]]가 보도한 "차관" 기사로 인해 정권의 압력으로 발행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71년 8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탄압을 받다가 결국 굴복하여 인건비 절감 명목으로 관련 기자들을 해고하였다. 1977년에는 사장직을 [[이동욱(언론인)|이동욱]][* 1917~2008.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선배인 설산 장덕수 선생의 주선으로 1947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조사부장, 논설위원, 이사, 주필 등을 지냈고, 부사장과 사장을 거쳐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동아일보 회장으로 재직했다.]에게 넘기고 회장에 취임했고, 1980년 2월 인촌기념관 3김 회동 때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 집권 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동아방송]]을 신군부에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다. 1981년부터 이동욱에게 회장직을 넘겨준 뒤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국제언론인협회 종신회원, 고려중앙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대외 활동에 나서며 문화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해오다가 1994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호를 따서 지어진 [[일민미술관]]은 구 [[동아일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사옥 건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