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옥 (문단 편집) == 기타 == * [[서울종로경찰서|경성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진짜 김상옥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김상옥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주장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면 당연히 총독의 개인 경계도 강화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를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할 이유가 있었겠냐는 것. 일제는 진짜 장본인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해서 그를 추격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에 암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표를 종로경찰서로 변경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 일반적으로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에 사용하던 폭탄이 다소 만듦새가 조잡했던 것과는 달리,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 보도에는 폭탄 제조자가 [[유태인]]이나 [[아랍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독립운동가)|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이태준은 이미 1921년 죽었고, 사건은 2년 후의 일이므로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기술력을 지닌 [[한국 독립운동|독립운동]] 단체가 [[의열단]] 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일종의 실험적인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조된 폭탄의 위력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도 해 볼 겸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9a64ed2f05074d.png|width=100%]]}}} || 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진다. 총열이 조금 더 짧다는 점과 방아쇠울이 다르게 생겼다는 점을 빼면 [[S&W M2]]와 비슷하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인적으로 개조한 모양이다.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에 추서 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 [[국가보훈부]]에서 1992년부터 선정/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최초로 선정된 인물이다. (1992년 1월) * [[대학로(서울)|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가 순국한 곳이 있는 종로4가 북쪽 [[서울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 * [[이상(작가)|이상]]의 친구로 유명했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이 중학생 시절 그 김상옥의 순국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이때의 강렬한 영향이 그의 야수파 화풍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 생전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본진과 같은 영덕철물점을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 기마경찰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인 [[일본제국 경찰]]이 말에 타고 있었으므로 그가 훨씬 불리했음에도 제압하고 검을 빼앗은 것이다. 그저 구전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며, 실제로 이때 빼앗은 검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으며, 당시 총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 그 사격실력 덕분에 쌍권총으로 소총을 든 일본인 순사 수백명과 대등이 싸웠다.] * 사회활동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선 사람. 자신이 설립한 '영덕철물점'이라는 곳을 기반으로 능란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철물점 종업원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단발령]] 이후 사람들 사이에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대개 수입산이지라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창안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그의 항일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 중 하나로, 김상옥 의사가 [[중국]]에 있을 때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류 독립투사 장규동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김상옥에게 돈을 주며 '관'을 사 오라고 했으나, 김상옥은 그 돈으로 관을 사지 않고 권총을 사 왔다고 한다. 동료의 원한을 갚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관보다는 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물론 장례식을 위한 관은 동지들이 돈을 모아 따로 구입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곽낙원]] 여사에게도 있다. 여사의 생일상을 차리겠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내 먹을 것은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한 다음, 생일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권총]] 2자루를 내놓았다고 한다.] * 보통 여느 독립투사들이 벌인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 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은 순국 '추모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는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비록 [[일본 제국 경찰]]과 서울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마지막 1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다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김상옥 의사가 펼친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린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 명은 어릴 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 놈들은 수천 명인데 왜 이분은 홀로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순국하는 당시의 일화에도 [[일본 제국 경찰]]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난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 제국 경찰]]들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한다. * [[종로5가]] 효제동에는 김상옥 의사 의거터라는 정류장(정류장 ID : 01-204)이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김상옥 의사가 자결한 집이 있는 곳은 이미 허물어져 골목길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신 [[종각역]] 8번 출구 앞에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http://kko.to/FbJmlAyjO|#]] * 문서 상단에도 있는 김상옥 의사의 사진은 거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찍은 것인데, 특이하게 뒷짐을 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차마 드러낼 수가 없어 손이 보이지 않도록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이 모습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도 재현되었다. * 관련도서: <김상옥 평전, ISBN 978-89-285-0695-8>, <독립운동가 김상옥, ISBN 979-11-982658-0-7>, <경성을 쏘다, ISBN 978-89-6319-100-3>, <조선의열단 쌍권총 김상옥>, <이몸 하나로 일본제국을 깨련다> 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