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준(농구) (문단 편집) ==== 명지중에서 안성골로 ==== 잠시 [[주유소]]를 운영하다가 2001년, 모교인 [[명지중학교(서울)|명지중학교]]의 감독을 거쳐 2006년 9월에는 은사인 정봉섭 체육부장의 부름을 받아 [[장일(농구)|장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중앙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했다. [[명지중학교(서울)|명지중학교]] 감독 시절에는 [[김시래]]를 지도하면서 개인기를 배려했고, 중앙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박을 쳤다. 과거에는 대학농구 하면 한동안 '안암골' 고려대와 '신촌골' 연세대 양강이었고, '안성골' 중앙대는 80년대부터 [[한기범]], [[김유택]], [[허재]]로 인해 강호가 되기 시작했는데, 90년대에도 스카우트가 어려운 평이 있지만 김영만 같은 좋은 선수들이 안성골에서 활약했고, 이후 [[임재현(농구)|임재현]]과 [[김주성(농구)|김주성]]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스카우트는 결코 쉽지 않고, 젊지만 운동을 병행해야 하고 체력도 강해야 한다. 이 과정을 보면 김상준 감독은 철저한 준비를 한 격이다. 과거 [[김태환(농구)|김태환]] 감독을 중심으로 가드 라인에 [[황진원]]과 [[임재현(농구)|임재현]]을 시작으로 포워드-센터 라인에 [[송영진(농구)|송영진]]과 [[김주성(농구)|김주성]] 이후 중앙대학교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함지훈]], [[윤호영(1984)|윤호영]], [[강병현(1985)|강병현]], [[김선형]], [[오세근]]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조련하고, 일부는 직접 리크루팅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우수한 선수들을 이끌고 40분 풀코트 프레싱을 기반으로 한 질식 농구를 선보이면서 무려 '''52연승'''의 신화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견이 있는데, 전임 감독이 쌓은 자원을 바탕으로 성적을 냈지만 뒤를 이을 선수 스카우트에 소극적이어서 중앙대 농구부의 침체를 만들었다. 덧붙여 최전성기를 만든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초반 멤버 중 [[임동섭]], [[정성수]], [[최현민]]을 뺀 나머지 선수들은 2015년 토토 사건에 연루되었다.] 김상준 감독은 중앙대에서 무려 117승 9패라는 전례를 찾기 힘든 기록을 남겼다. 한국 대학 농구가 리그전으로 나오면서 '''역대급''' 성적인데, 이건 자율의 [[연세대학교|연세대]]와 엄격의 [[고려대학교|고려대]], 그리고 숨어 있는 [[경희대학교|경희대]]도 해내지 못한 한국 대학 농구의 사기 성적이다. 더군다나 중앙대 농구부는 중앙대 출신도 아닌데다 학력이 [[고졸]]에 불과한 [[김태환(농구)|김태환]] 감독도 못해낸 엄청난 성적이었다. 사실 인력이 많은 고려대와 인력이 다양한 연세대, 그리고 인력이 뭉치는 경희대라는 소위 한국대학농구의 대학 빅4 라인 속에 스카우트 경쟁에서 승리한 격이다. 이렇게 대학 리그를 평정한 활약으로 일약 주목받는 젊은 감독의 반열에 오르면서 프로농구 감독 후보로 등극하게 된다. 2009년 전국대학농구 2차 연맹전에서 중앙대는 충격의 예선탈락을 겪게 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김상준 감독은 [[미국]] 연수를 결정했다. 미국에서 한층 정교해진 전면 강압수비를 배웠고, 다음해 MBC배 대학농구와 원년 대학리그의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오세근과 김선형을 중심으로 한 압박수비와 빠른 플레이는 어느 팀에게도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1년 정들었던 모교인 중앙대학교와 이별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 출신 대선배인 [[허재]]와 각별한 관계라고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