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진(1977)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용봉초등학교 5학년 때 선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내성적이고 숫기없는 성격이었던 김상진은 "야구로 성공하면 명문대도 갈 수 있고 [[선동열]]처럼 1억원을 벌어서 부모님도 '호강' 시켜드릴 수 있다"는 감독의 말에 수긍하여 곧바로 2학기 때 서림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어쩔 수 없이 야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는 야구가 하기 싫어서가 아닌 돈 많이 드는 야구 한다고 하니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하셨던 것과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이 겹쳐 야구를 할 때도 소심한 모습으로 일관했었기 때문이다.] 진흥중학교 진학 이후 강의원 감독[* 제자 [[김진우(1983)|김진우]]의 활약에 힘입어 팀을 [[2000년]] 봉황대기와 [[2001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감독에서 물러나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 체육 교사로 근무했다. 아들 [[강하승]]도 진흥고를 졸업하고 [[고양 원더스]]에 입단 후, [[KIA 타이거즈]]로 스카우트 되었지만 1년을 뛰고 방출되었다.]의 지도 하에 실력이 급성장했다. 강 감독은 나중에 김상진이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로 진학하는 시기에 맞춰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6년간 사제지간으로 같이 야구를 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하루 2,3 시간씩 학교 뒷산인 운암산을 뛰어 다니는 러닝 위주의 훈련으로 [[박찬호]]에 버금가는 단단한 하체의 소유자가 되었고 아마추어 선수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컴퓨터급 제구를 선보이며 야구계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당시 [[1995년]] 고교 전국 대회에서 '''[[평균자책점]] 0.86을 달성'''했고, [[커브]], [[슬라이더]], [[패스트볼]] 평가가 상당히 좋았으며, '''최고 구속은 145km/h까지 찍었다.'''[* 고등학생이 145를 찍었으니 프로에 와서 더 훈련받으면 140대 후반 내지는 150km를 찍을 확률도 높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