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진(1977)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 '''아버지 어머니가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죠. 야구가 내 직업이잖아요. 야구말고는 살 길이 없어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 -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 '''명문 해태의 10승대 투수로 태어나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이어가겠다.''' > - 입단 당시 첫 훈련때의 출사표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b0049950_48c532f4d0da9.jpg|width=100%]]}}}|| || 1996 시즌 입단 동기들과 함께[* 당시 해태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은 선수가 2명이 더 있는데, [[김상훈(1977)|김상훈]]은 고려대에 진학한 후 2000년에 입단했고, [[서재응]]은 인하대에 진학했다가 중퇴 후 [[뉴욕 메츠]]와 계약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종국(야구)|김종국]]은 1973년생이나 고려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프로에 데뷔해서 입단 동기가 되었다.] || 가난한 집안 사정이었지만 당시 대다수의 고교 선수들은 대학교로 진학하던 [[트렌드]]에 따라 [[연세대학교 야구부]] 진학이 거의 기정사실 수준으로 굳어졌었는데,[* 본인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했을 만큼 간절히 원했다.] 당시 상당히 고령이었던 그의 아버지[* [[1924년]]생으로 김상진 본인과는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 수준의 나이차이가 났으며 형, 누나와도 나이 차이가 10살이 넘었다.]가 막내아들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셔서 강하게 해태 입단을 권유했고 결국, 대학의 꿈을 접고 프로로 선회했다.[* 연세대의 김충남 감독은 직접 광주로 내려와서 강의원 감독에게 메달릴 정도로 김상진을 데려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지만 실패하자 강의원 감독에게 엄청나게 뭐라 했을 정도였다. 다만, 김상진이 연세대를 포기한 이유는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목재 공장을 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었는데, 심지어 이 당시엔 팔이 부러진 상태였다. 김상진 본인도 대학 진학을 취소한 것에 대해 동기 3명은 같이 데리고 갈 수 있던 상황인데 취소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에 [[해태 타이거즈]]는 1억원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모험수를 뒀다. 더구나 [[외환위기]] 직전 모기업 상황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해태가 제시한 1억은 다른 구단의 2~3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1996년 데뷔 시즌부터 선발진에 합류하여 5월 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따냈고, 데뷔 첫 해에 9승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해 신인왕을 노려볼 만 했지만 [[현대 유니콘스]]의 괴물 신인 [[박재홍(야구)|박재홍]]이 사상 최초의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맹활약하면서 신인왕 경쟁에선 밀렸다. 1997년에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아쉽게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147이닝을 던지면서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WAR 3.25를 기록하여 시즌 내내 해태 선발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LG 트윈스]]와 맞붙은 [[1997년 한국시리즈|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 팀의 아홉 번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웠다.[* 이 경기에서 본인의 최고 구속인 149km를 기록했다.] 해태팬들은 새로운 에이스급 투수의 출현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김상진이 '해태 타이거즈'라는 이름의 마지막 [[헹가래 투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해태가 아홉 번째 우승을 거두고 정확히 1주일 후에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머물던 세 시즌 동안 신인치고는 묵직한 경기운영으로 해태의 4선발 정도의 위치[* 말이 4선발이지, 그 앞의 세명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이었음을 생각하면 타팀의 2~3선발과도 겨뤄볼 만 했다.] 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음은 물론이고, 첫 번째 시즌과 두 번째 시즌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까지 누리며 앞으로의 프로 경력도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