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생 (문단 편집) == 글씨 == >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 · 李革, 奉帝勅至館, 書圖蔟.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 숭녕(崇寧) 연간에[* 북송 [[휘종(송)|휘종]]의 연호로 [[1102년]]에서 [[1106년]] 사이.] (고려의)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에 가서 변경(汴京)에 묵고 있었는데, 그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고려 사신의) 숙소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서와 초서 글씨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서 > "뜻하지 않게 오늘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의 관직이 우군대장군이었기 때문에 으레 왕 우군으로 불린다.]의 친필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하자 홍관이 말하였다. > "아니다.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 "천하에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 >----------------------------------------------------- > 《삼국사기》 권제48, 열전제8, 김생 김생의 글씨 가운데 친필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중기까지는 김생의 글씨가 고려 땅에 많이 남아있었고 고려의 학자들이 그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고 했으므로, 김생이 글씨를 많이 남겼으되 고려와 조선의 전란을 거치며 많이 소실된 듯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김생이 썼다는 전유암산가서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후대에 김생의 글씨를 본떠 모사한 것이라 한다.[[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7972|#]] [[2006년]]에 [[이화여대]] 중문과 정재서 교수가 집안 대대로 소장하고 있던 서책 몇 권을 공개했는데,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공동기기원이 지난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720년에서 840년 사이에 만든 것'''임이 확인되었다. 정재서 교수의 9대조로 영조 때 청도군수를 지냈던 정창유에게 바친 것인데, 당시 김생이 머물렀던 절이 불이 나면서 불복장 유물 속에서 이 글씨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걸 정창유에게 가져다 바쳤고, 그 9대에 걸쳐 보관하고 있었다고.[[http://news.joins.com/article/2511119|#]][* 조선 시대까지 드문드문 김생의 친필로 전하는 글씨를 내가 봤다고 적은 문헌들이 종종 보인다.] 현전하는 작품 대부분은 그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비석에 새긴 것이다. 16세기에 제작된 해동명적이라는 금석문 탁본 모음집에 김생이 쓴 '送賀賓客歸越'[*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강남으로 돌아가는 하지장(賀知章)을 위해 지어 주었다는 칠언시.]이라는 글씨가 실려 있고, 이 밖에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문헌에 김생이 썼다고 전하는 사찰 현판에 대한 일화나 금석문 글씨에 대한 호평이 많다. * 안양사의 편액을 썼는데 몇 년 뒤에 그 편액을 건 건물이 갑자기 남쪽으로 기울어지자 김생을 다시 불러다 북쪽에 글씨를 ~~무게중심이 맞아서~~ 쓰게 했더니 건물이 다시 반듯해졌다. * 청룡사[* 안동 청량산에 아직도 있는 절. 경내에는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전하는 난가대라는 곳도 있다.]의 편액을 썼는데 그 편액 주위에는 항상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김생에게 찾아와서 《제석경(帝釋經)》을 써달라고 청했는데, 김생이 써주고 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제석(帝釋)의 사자다. 나에게 명하여 글씨를 받아오라고 해서 온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나주]] 객사(客舍)에 있는 '유색루(柳色樓)'라는 현판은 김생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현판이었는데, 옛날에는 도깨비들이 그 누각 안에서 소란을 피워서 사람들이 들어가 지낼 수가 없다가 그 편액을 써서 건 뒤로는 도깨비들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김생의 필력(筆力)이 부정한 것을 물리친 것"이라고 했다. * 경주에서 [[월정교]] 복원이 진행 중인데 남쪽 현판이 [[김생]], 북쪽 현판이 [[최치원]]의 글씨체이다. 김생과 최치원 글씨들은 전부 집자현판에서 필요한 글자들을 집자해서 만들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해금강]]에 사는 용왕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글씨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석문으로는 고려 시대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원래는 경복궁 안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것이라 전한다. 조선시대 성대중은 이 비석의 글씨를 두고 "마치 3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 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 하고 그 힘을 칭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