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범(소설가) (문단 편집) == 생애 == 김석범은 1925년 10월 2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아버지 신수련(愼洙連)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광복 이전까지 일본에 주로 거주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1943년에는 부모의 고향인 [[제주도]]에 1년여 간 머무르며 그곳의 청년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할 계획을 짜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김석범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바람에 무산됐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국학대학]][* 당시 국어학자 [[정인보]]가 세운 학교로 이후 이 학교가 [[우석대학교(서울)|우석대학교]]가 되어 [[고려대학교]]에 흡수된다.] 국문과를 다니며 공부를 했지만 결국 학비와 생활비 부족으로 인하여 48년경 [[밀항]]을 통해 오사카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가 오사카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제주도]]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통해서 [[제주 4.3 사건]] 당시 벌어진 참극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이때 받은 충격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그는 [[칸사이대학]] 전문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교토대학]] 문학부 미학 전공을 졸업한 이후 그는 조선인 청년·노동자를 위한 청년학교를 열어 한국사와 사회과학 등을 가르쳤으나,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민족학교 금지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그 해 9월로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역사학자 강재언(姜在彦) 등과 함께 '조선평론' 이란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얼마 못가고 이듬해인 1952년 고향 오사카를 떠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관련 조직에 들어가 근무했다. 1967년 그는 재일문학예술가동맹에 관여하면서 '문학예술' 이란 한글잡지를 편집하고 있었고, 첫 작품인 《까마귀의 죽음》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즈음 조총련 조직 내부에서는 그를 '자유주의자'라며 비판하는 시각이 있었는데, 이때 작품 발표 전에 검열을 받으라고 간섭을 하여 갈등을 빚었고, 김석범은 마침내 1968년 조총련과 결별하게 된다.[[https://news.joins.com/article/3546474|#]] 그는 이후 계속해서 4.3 관련 소설들을 썼고, 1965년부터 1997년까지 [[대하소설]] <[[화산도]]>를 집필하였다.[* 이 소설들은 전부 [[일본어]]로 써졌기에 한국에 정발될 때는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로 그는 1984년 [[아사히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상을, 1998년에는 마이니치 예술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도 2015년 제주4.3평화상, 2017년 제1회 이호철문학상을 수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