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주 (문단 편집) == 생애 == [[1634년]]([[인조]] 12) [[한성부]] 회동(현 [[회현동(서울)|회현동]])에서 [[김좌명]]과 [[평산 신씨]] 부인 신지강(申止康, 1617 ~ 1667)[* [[선조(조선)|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선조)|정숙옹주]]의 딸이다. 즉 김석주는 선조의 외증손자이다. 밑에도 나오지만 김석주의 외아들은 숙정공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는데, 숙정공주가 효종의 딸이므로 김석주의 아들은 자신의 9촌과 결혼한 것이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육]]은 명재상으로 유명했고 아버지 [[김좌명]] 또한 당대의 수재이자 우수한 행정 관료로 유명했다. 작은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현종(조선)|현종]]의 장인으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였다. 이러한 가문의 기질을 잘 이어받은 것인지 그는 일찌감찌 명석함을 드러내 [[과거 제도|과거]]에 장원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육은 어린 김석주를 '석아(錫兒)'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험악한 외모와 달리 정략과 문무겸비는 물론이고 글씨도 잘썼다.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할 정도였다니 글과 학문은 확실했을 듯. 동료들 사이에서 [[외척]] 출신으로 분류된데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육이 [[대동법]] 확대를 둘러싸고 [[송시열]] 등의 [[산당]]과 대립한 것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같은 [[서인]] 계통임에도 주류인 산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s-3|2차 예송논쟁]]이 터지자, 대공복(9개월)을 주장한 서인들과 달리 1년설을 주장하던 [[남인]]들과 뜻을 같이했다. 결국 [[현종(조선)|현종]]이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산당 계열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승승장구하며 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의 [[숙종(조선)|숙종]]이 즉위하자 [[청남]]-[[탁남]] 연립 정권 내부에서 주요 외척이었던 그는 몇 안되는 서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의 삼촌인 김우명은 삼복이라 불리던 숙종의 5촌 당숙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남인]]과 결탁하며 잘 나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서 제어하려 했다가 왕에게 '친족을 [[무고]]한 남' 소리까지 듣고 굴욕을 당했지만 김석주 본인은 한동안 [[허적]]을 비롯한 남인, 그 중에서도 탁남 세력과 잘 지냈'''었'''다. 하지만 권력의 타성에 젖은 남인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김석주는 이들을 내쫒고 자신의 위치를 더 확고히 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야사(역사)|야사]]에 의하면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조선)|김만기]][* [[인경왕후]]의 아버지. 그의 동생이 유명한 대문장가 [[김만중]]으로 두 형제 모두 [[송시열]]의 추종자로 골수 [[서인]]이었다. 또한 김석주의 부인 이씨의 처외사촌이고 처외숙부인 김익훈의 조카이기도하다.]가 자객을 사주하여 김석주의 집 뜰에 보내놓고 허적의 소행이라고 모함을 하는 등 이간질을 했다고 하나 김석주가 그 정도에 속을 바보는 아니니 결국 자신의 의사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인들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유부녀를 납치하여 행패를 부리고 김우명의 첩을 폭행해 이빨을 부러뜨리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하여 사건을 묻으려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고, 청남과 탁남은 조정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허구한 날 으르렁거려 숙종의 눈밖에 나고 만다. 결국 [[1680년]](숙종 6) 숙종은 [[경신환국]]을 일으켜 급작스런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일반적으로 허적이 왕의 허락도 없이 유악(천막)을 가져간 것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으며, 허적 본인도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 정원로 등이 허적의 유일한 아들인 허견과 복선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함으로써 남인은 허적이나 [[윤휴]] 같은 명망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약|사사]]되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때 김석주는 주도적으로 남인의 혐의를 잡아내면서 [[공신#보사공신(保社功臣)|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다. 사실 정원로는 바로 김석주가 부리던 이중첩자였다. 그 외에 김석주가 부리던 여러 정보원들이 대거 공신에 봉해졌다. 이 무렵 청남과 탁남은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하고 처벌하라는 주장을 일치단결하여 아뢰고 있었는데 덕분에 송시열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김석주가 남인 정권을 몰아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자 송시열과 그의 제자 [[김수항]] 등은 모두 김석주를 높게 떠받들었다. 허나 김석주는 아직 남인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불안을 느껴 [[김장생]]의 손자이자 처숙부인 훈련대장 김익훈 등과 연합해 남인 김환을 꾀어내어 남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나 첫 번째 시도는 허새, 이의, [[권대운]], [[민암]]을 비롯한 남인 계열 대신들이 포함되었다는 허세에 넘어가서 허탕만 쳤고[* 허새가 일을 꾀하려 한건 사실이지만 권대운, 민암 등의 일은 사람들을 더 잘 설득하려고 꾸민 거짓말이었다.] 이에 열받은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인 [[전익대]]을 압박하여 남인 계열 대신들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고 사건을 조작하려다가 전익대가 이를 실토하는 바람에 들통나고 만다. 이후 전익대는 유배 후 처형됐다. 이에 젊은 서인들이 김석주를 직접 비난하지는 못하고 대신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김익훈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송시열은 김익훈이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우회적으로 김익훈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 행동이 오히려 젊은 서인들의 반발을 일으켜 송시열의 위신이 깎이고 [[박세채]], [[남구만]], [[윤증]]을 중심으로 [[소론]]이라는 새 당파가 분당되는 결과만 낳았다. 어쨌거나 김석주는 숙종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서 자신을 공격하던 오도일을 비롯한 서인 [[소장파]]를 맹공하여 [[대관령]] 너머로 귀양보냈다. 숙종은 대관령 안쪽인 [[김화]]로 귀양보내려 했지만 김석주가 왕의 말을 끊으며 거긴 너무 가까우니 [[영동]]의 아홉 고을 중에 골라 보내라고 압박했고 왕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행동은 숙종의 눈 밖에 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지만 얼마 안 되어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1684년]](숙종 10)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