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주 (문단 편집) == 의외의 면모 == 문과 장원 급제 출신으로 조선 후기 산문사에서 형식미로 손꼽히는 문인이다. 여러 차례 문형(文衡)[* '학문의 저울'이라는 뜻. 조선 초에는 예문관대제학과 성균관대사성을 겸임한 자를 일컬었고, 홍문관이 법제화된 뒤에는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한 자라야만 문형의 칭호를 얻을수 있었다. 당대 학문의 수장인 셈.]을 역임했고 개성 있는 문체를 확립했다. 한문사대가(=[[월상계택]]) 등 이전 문인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후대 문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참고: 이영환, 식암 김석주의 책문 연구] 후대의 문인 홍직필(洪直弼, 1776 ~ 1852)은 우리나라 8대 문장가로 [[이색]], [[김종직]], 최립, [[장유(조선)|장유]], [[이식(조선)|이식]],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을 뽑았고 2명을 더 넣는다면 [[이정구(조선)|이정구]], [[신흠]]을 더할 수 있다고 했다. 조부 김육이 기존에 조선이 써오던 대통력(大統曆)을 [[시헌력]]으로 교체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역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김석주 또한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상감(觀象監)[* 조선 시대 천문, 지리, 역학 등 업무를 관장하던 현재의 기상청에 가까운 기관.] 직장이던 송형구(宋亨久)가 청나라의 시헌력을 폐지하고 다시 명나라의 대통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치자, 송형구의 주장이 시헌력의 정기법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임을 파악하여 시헌력의 정확성을 옹호하였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31_0050_0010_0020|링크 참조]] 조선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 1658 ~ 1735)의 12촌 형이다. [[김식(조선)|김식]]의 후손으로 김석주는 김식의 장남 김덕수(金德秀)의 후손이며, 김석문은 4남 김덕무의 후손이다. 김석문은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하여 우주론을 그림과 글로 상세히 정리하였다. [[김창흡]]과 이희조가 그의 학문을 알아주었다고 하며, 김석주 또한 역학에 뛰어난 김석문을 보고 '대성공大成公(=김식)의 성리학이 전해진 바가 있다'고 칭찬한 것이 전해진다.[* 참조: 김성환, 김석문의 학문 배경과 역학도해의 전승 과정] 청풍 김씨 집안이 가학으로 역학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