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준(교육감) (문단 편집) === 대학 시절 === 대학 신입생이었던 1975년 5월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해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고, 이런 조치를 비판하는 행위조차 처벌하도록 규정한 초법적 조치였다. 김석준 교육감이 대학 3학년이었던 1977년은 서울대 사회학과가 설립 30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래서 사회학과 학생들은 10월 학교 축제에 맞춰서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심포지엄 발표자로 선정됐던 김석준 교육감과 여러 친구들의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훗날 그날의 시위는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유신정권 말기의 숨 막히는 대학가의 상황에 숨통을 틔워주고,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는 도화선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절 가장 존경하는 학문의 스승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신용하 교수와 김진균 교수를 꼽는다. 신용하 교수님이 학문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라면, 김진균 교수님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라고 회고한다 당시에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꼭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통해서 민주화 운동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사회학과 대학원 과정을 미국으로 유학 가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래서 수업의 내용도 미국의 주류 사회학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의 미국식 사회학 일변도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우리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사례 또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통한 고찰 등 실질적으로 한국사회에 필요한 사회학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문제의식을 적극 지원하고 지도해준 분이 신용하 교수였고 80년 봄에 신용하 교수가 만든 한국사회사연구회의 초대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또한 김진균 교수는 ‘관운장’이라는 별명만큼이나 풍모가 준수하고 인품 또한 넉넉한 분으로 40대 이후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나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실천에 앞장서신 보기 드문 분이었다고 김석준 교육감은 기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