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준(교육감) (문단 편집) === 사범대 교수시절과 80-90년대 === 당시 대학가에는 졸업정원제가 도입되어 3, 4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학생 수가 2배 이상 늘어났다.그에 따라 대규모의 교수 충원이 필요했고, 연구경력 3년 이상이라는 최소요건만 충족되면 전임교수 지원 자격이 주어졌다. 그는 석사과정 2년과 박사과정 1년, 국립대 조교 2년, 강사생활을 1년을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된 상황이었다. 대학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추진한 졸업정원제라는 졸속한 정책이 오리려 좋은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됐다. 이로써 당시 김석준 교육감은 부산대학교 사범대 일반사회교육학과 전임강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 당시 나이 만 26세밖에 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부산대학교 최연소 교수라는 타이틀까지 달게 되었다. 임용과 함께 83학번의 지도교수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특히 운동권, 혹은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던 학생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는데 이런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른 교수들로부터 구박을 받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본인이라도 작은 방패막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석준 교육감은 그런 학생들과 근교 산을 등산하기도 했고, 수배를 받고 쫓기는 학생을 본인의 연구실에 숨겨주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80년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국민들의 요구와 노력에 의해 민주화를 이루었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 시기에 학계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와 참여가 있었다. 그는 그때 서울대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연구와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모두 지방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모여 각자의 연구 성과들을 쉽게 나눌 수 있었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주제를 통해 지역학술운동의 발전에도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었다. 이때 함께했던 장학자들은 훗날 제3세대 학자로 불리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학술연구 집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후에 대학민주화를 고민하던 교수들이 모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조직했다. 부산지역 교수들도 함께 모여 민교협을 만들었고, 1988년 11월에는 부산경남민주화교수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부산경남민교협의 초대총무를 맡아 민주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민교협 기획강좌 등을 기획하고 실무적인 일들을 챙기느라 전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80년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1981년에 시작한 박사과정을 1992년 8월, 거의 데드라인을 채우고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제출한 「경제 변동에 대한 지역사회의 계급적 대응: 1980년대 산지역을 중심으로」라는 학위논문은 다음 해에 『부산지역 계급구조와 변동』이라는 제목의 일반학술서로 출판되었고, 지역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 지역사회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대학교수들을 주축으로 지역연구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사회학,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모여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사회의 의미 있는 변화를 보다 큰 틀에서 바라보고,사회적으로 필요한 실질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이미 1985년에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대구의 ‘지방사회연구회’를 모델로 하여 부산경남의 연구자들이 모여 1988년 4월에 ‘지역사회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지역사회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연구발표회를 통해 지역사회의 현안 문제에 대해서 또는 개별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92년에 박사논문 제출후 ‘부산지역’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차에 ‘지역사회연구회’에서 함께 연구 활동을 했던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노동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 영남노동운동연구소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연구자들이 주가 되는 다른 연구소들과 달리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변호사와 노동문제 전문가를 비롯한 연구자들과 현장의 노동조합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간부들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현장의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출범을 했다. 연구소 출범 이후 김석준 교육감은 8년 동안 소장직을 맡아 활동을 했고, 2006년 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1994년에 문을 연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해산될 때까지 12년간 지역노동운동의 발전에 나름대로는 뜻있는 일들을 많이 해왔다. 특히 연구소가 발간한 산별노조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책자는 산별노조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 노동운동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국내외의 여러 사례들과 연구자들의 관점과 대안이 제시된 연구결과나 각종 연구 자료들은 노동현장에서 교육이나 홍보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또한 학술적으로 부산의 오늘과 미래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만, 부산 사람들의 부산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컷기에 부산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고 다니며 만든 『김석준, 부산을 걷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부산 사람들이 먼저 부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부산을 생각하고 부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번성하는 도시의 이면에서 소외되고 버려졌던 것들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던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저서다. 이후 동항초등학교, 동아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1981년 만24세에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식 주류 사회학을 거부하고 한국적 사회학의 필요성을 주창했다고 한다. 석사를 마치고 2년 후인 1983년, 박사 학위가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26세의 나이에 부산대학교 사범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당시 전국 최연소 교수 임용이라고 한다. 교수가 된지 9년 후인 1992년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 실적도 딱히 없는데, 이른 나이에 학위도 없이 최연소 교수가 된 배경을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집안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후 30년간 교직에 있으며 연구실과 강의실보다 오히려 현실 정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수 시절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창설되었을 때, 이에 최초 가입한 64명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1994년 부산경남지역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를 창립하여 본인이 소장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