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준(교육감)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1997년 [[민중당(1990년)|민중당]] 해산 이후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주도하여 창당한 [[건설국민승리21]] 창당에 참여했다. 1999년 부마 항쟁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해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독재를 비판하고 [[전태일]] 분신사건이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0년 [[건설국민승리21]]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여 8년간 몸담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민노당은 창당된 이듬해에 치루게 된 선거라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김석준은 부산시당에서 2001년 11월 일찌감치 후보로 내정되어 민노당에서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 당시 민노당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2002년 5월에야 발표한 것을 보면 민노당 부산시당에서 김석준의 입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선거에서 그는 토론회에 참여해 논쟁을 펼치며 한나라당은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며 복지, 사회권, 환경, 노동, 공무원 노조 등을 내세으며, 노동자 보육시설 확충, 공무원 노조를 통한 공직사회개혁, 환경을 파괴하는 KTX 부산-대구 구간[* 초창기 KTX는 서울에서 대구까지만 고속선을 완공한 상태에서 선개통하여 대구-부산 구간은 기존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며 저속으로 완행을 했다. 이후 대구-부산 전용 고속선 공사가 추가로 진행되어 추후 완공되었다.] 전면 백지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시 토론회에서 복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정작 복지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고 다만 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만 반복했다. 당시 선거에서 그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등 노동계와 부산 시민단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16%의 지지율을 얻어 3위로 낙선했다. 낙선했지만 민노당에서는 이러한 선거 결과를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한나라당 안상영 후보가 압승을 거둔 가운데, 민주당 한이헌 후보의 19%와 불과 3%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차기 선거를 노려볼 만 하다는 평이 나왔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여 식상함으로 지지율이 첨차 떨어졌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정국 속에서 총선 때 [[금정구(선거구)|금정구]]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16%대의 지지율을 받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노무현 탄핵 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80%의 지지율(호감도)를 얻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선거가 시작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10% 내외의 지지율을 보였고 결국 9.57%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3위로 낙선했다. 김석준은 노무현 탄핵만 없었어도 80%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탄핵 역풍으로 인해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면서 패했다고 주장했다. 총선 참패 이후에도 김석준은 민노당 부산지부의 언터처블 1인자였지만, 총선에서 9%로 참패한 여파로 당 내외에서 그의 입지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2004년 6.5 재보선에서도 부산시장 후보로 민노당에서는 김석준과 견줄만한 인물이 전무했기에 언론에서는 이구동성으로 그의 출마를 점쳤지만 총선의 참패의 충격이 거론되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민노당 지지 언론인 [[오마이뉴스]]는 김석준이 불출마한 것에 대해 쩐의 문제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비록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김석준과 민노당 부산시당은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허남식]] 한나라당 후보의 동성게이트 연루 의혹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쳤지만, 결국 허남식 후보가 62.3%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총선에는 참패했지만 2004년 7월 민노당 부산지부장으로 압도적 표차로 재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지도부는 대폭 물갈이되었다. 김석준은 2006 지방선거에서 수십명의 후보를 내고 2012년에는 부산에서 집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04년 하반기에는 도룡뇽을 보호하기 위해 [[KTX]] 부산-대구 구간의 [[원효터널]] 공사를 반대하는 지율 스님의 단식 투쟁에 적극 동참했다. 이미 이전에 부산시장 선거 때부터 김석준은 환경을 파괴한다며 KTX 부산-대구 구간 전면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또 2004년 하반기에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동참했다. 2005년 6월, 오는 11월에 부산에서 치뤄질 [[APEC]] 정상회의와 [[조지 W. 부시]]를 반대하기 위해 부산지역 33개 시민단체를 연합하여 'APEC 반대, 부시 반대 부산시민행동'을 결성하고 공동대표에 취임했다.이후 APEC 정상회의 및 미국을 반대하는 부산 지역 시위를 지휘했다. 11월 APEC 정상회의가 열리자 반APEC 시민행동이 주도하는 시위가 부산 곳곳에서 대규모로 열려 무려 10만여명이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64748|#]]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64722|#]]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67354|APEC 시위대 10만명은 누구]]. 당시 APEC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무현산성]]이라 불리는 컨테이너 차벽을 설치하는 등 평화 시위라고 주장하는 김석준의 주장과 달리 시위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2006년 부산시장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다시 출마했으나 [[또 졌어|또 낙선]]했다. 지난 지방선거 때보다 지지율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후 계파 갈등으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 상임선대위원장 겸 부산선대위원장이 되었다. 상임선대위원장이 된 후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 정부의 폭주를 견제하고 교육대란, 집값대란, 의료대란, 일자리대란, 대운하 환경 대란 등 5대 재앙에 맞서기 위해 진보신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김석준 본인은 그동안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는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선하여 국회로 진출하는데는 실패했다. 2008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MBC 여기자가 정몽준 한나라당 후보에게 “오세훈 시장은 사당 뉴타운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질문하자 정몽준 후보가 질문을 거절하며 뺨을 건드려 수치심을 느꼈다고 주장하여 [[성희롱]] 논란이 일었다.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김석준은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희롱을 일으킨 정몽준 후보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후 진보신당 부산시당위원장이자 시장 후보로 2010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했으나 민주당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후보를 사퇴했다. 당시 진보신당 중앙당의 야권 단일화 불참 결정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섰던 [[심상정]] 후보가 단일화에 참여했고, 부산에서 민주당과의 전면 단일화를 실시하여 당내에 파문을 야기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합류해 부산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