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김성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결심한 데에는 그의 통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941년 11월 1일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재건 선언>을 발표해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지 말고 임시정부의 주관하에 통일된 민족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후 그는 1942년 1월 22일 제22차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월 26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3.기념 준비위원으로 선임된 데 이어 선전조 주임으로 부임했다. 1942년, 김성숙은 임정 선전위원 겸 편집부 주임을 맡았으며 1943년 1월 5일 국무회의에서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의 아내 [[두쥔후이]]도 1943년 2월 3일 국무회의에서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 4일엔 김성숙이 내무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월 30일에는 두쥔후이가 외무부 외사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4월 24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 참가해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4년 1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정 주도권 경쟁이 권력투쟁 양상을 띠게 되자, 양당은 임시의정원의 선거방식과 관계없이 [[조완구]], 박찬익, 유동열, 김원봉, 김성숙은 국무위원으로 선출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김성숙의 정치적 위상이 임정에서 확고해졌음을 의미한다. 김성숙의 임정에서의 활동 가운데 쟁점이 된 부분은 이승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의 외교활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1945년 4월 25일 ~ 6월 26일 유엔 창립총회인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의 반소, 반공 활동이 국제사회에서 임정의 입지를 좁혔고, 더 나아가 국제 반파시즘 통일전선 및 대일 연합국 체제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임정의 외교 활동에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 주석에게 국무위원 사퇴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이승만 면직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대미 외교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김성숙의 이승만 면직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훗날 김성숙은 이승만 탄핵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승만이는 그때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느냐 하면 미국에서 그 사람은 본래 공화당 쪽하고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때 공화당에서 민주당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심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공화당의 충동을 받아가지고 굉장히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말이지. 나중에 동필무가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이제는 너희 다 틀렸다. 이젠 모든 일이 다 틀렸다" 뿐이야. > >그동안 내가 동필무나 주은래와 가깝게 사귀면서 그들을 통해 소련과 임정과의 관계를 많이 좋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지. 그래 중경에서 소련대사관이 리셉션을 베푼 때가 있었는데 임정 요원들도 많이 청했었지. 중공 친구들은 소련이 임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니까 이런 기회를 통해 임정을 이해하도록 중간에 서서 애를 쓴 것이지. > >그런데 동필무 얘기로는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모두 망쳐 버렸다는 거야. 무슨 얘기냐 하면,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이가 단장이라 해 가지고서 삐라를 돌리고 성명서를 내고 했는데, 소련이 1945년 2월에 열렸던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다 팔아먹었다고 야단을 치는 내용이더란 거야. 이런 짓을 했는데, 웬 여자가 돌리드래요. 그때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동필무 자기 자신도 그것을 받았다는 겁니다. > >자, 이래 놓으니, 그때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참가할 때이고 소련 대표단장 몰로토프 ( Molotov) 외상은 굉장한 우위를 과시할 때였거든. 몰로토프가 화가 나서, "이게 뭐냐?"고 집어던지고, 화가 굉장히 났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국 소련이 임정을 굉장히 반대하고. > >그러니까 그때 공화당으로서는 민주당을 곤란하게 만드느라고 이런 짓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승만이 앞장서서 그런 일을 했거든요. 자, 그래 놓으니 그 동안은 그래도 임정에 대해서 소련에서 좋게 생각을 했는데, 아! 갑자기 그런 일이 떡 나타나니까 소련에서 그만 화가 났지. > >소련은 그때 『전쟁과 공인계급(工人階級)』이라는 외교 잡지를 발간했는데 거기에다가 임정에 대한 그런 것을 써냈는데 욕을 무지무지하게 했어. 그 잡지는 소련말로 된 것인데 중국에도 다 나돌고, 그래서 임정은 꼼짝 못하게 됐어요. 이런 일을 중국 대표단이 돌아와서 다 얘기했지.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김성숙은 한중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중한문화협회 창립대회에 참석해 [[김규식]], 김원봉, 유자명과 함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3ㆍ1독립기념강연회,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25주년 기념 강연회, 전쟁 후에 있어서의 한국독립문제 좌담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좌담회 등 각종 행사를 주관했다. 또한 1945년 3월 15일 충칭의 중앙문화운동위원회 문화회당에서 열린 한국구제총회에 참석해 감사로 선임되었고 아내 두쥔후이는 이사로 선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