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광복, 그 후 ===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국이 광복을 맞이했다. 김성숙은 훗날 당시의 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 초순에 미국의 원자탄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한국 해방의 운명의 시일은 드디어 닥쳐왔다. 이것은 전 인류를 깜짝 놀라게 한 공전 최대의 뉴스였다. 이 뉴스를 전해 듣는 순간 필자는 경악과 황홀한 정신으로 낚싯대를 내던지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한국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날뛰었다. 나는 혼자서 피눈물을 머금고 광환(狂歡)한 것이다. > >정신을 가다듬고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도록 기쁨과 슬픔이 복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동거하는 두쥔후이 여사와 깊은 이해와 정성어린 격려를 받아가며 나의 낚시의 획득물인 붕어 튀김을 안주로 독한 대국주를 대량 마시며 형언할 수 없이 격동된 감정을 달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민족 해방의 꿈이 실현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러나 30여 년간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반일독립투쟁에 헌신한 임정의 앞길, 전 민족이 함께 걸어나가야 할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나는 대국주에 대취하여 기쁨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음날 새로운 생활을 전개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 >다음날 조소앙 선생은 친서와 함께 여러 동지들을 보내어 필자의 즉각 충칭 귀환을 요구하였다. 요지는 속히 들어와서 임정의 입국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에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해방된 이상 임정의 전도가 아무리 캄캄해졌다 하더라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3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해야 하겠고 자나 꺠나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를 만나봐야 하겠고 임정의 앞길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후까지 해봐야 할 것이 아니냐. >---- >'월간 중앙' 1968년 8월호, <아아! 임정 30년만에 해방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임정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가족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그는 1929년 [[두쥔후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3명의 아들 두건, 두견, 두련을 두었다. 그는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두쥔후이와 세 아들들을 중국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2월 1일 임정 요인들을 싣고 상하이를 떠난 주한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에야 옥구비행장에 도착했다. 김성숙의 마음은 벅차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땅에 엎드렸다.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코에 대어 보고 흙냄새를 맡았다. 다른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의 환국은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전에 이들의 귀국을 통보받지 못한 시민들은 그들을 환영하러 나오지 못했고, 임정 요인들의 호송을 맡은 미군의 태도도 거칠었다. 그들은 점심을 거린 요인들에게 저녁식사도 대접하지 않은 채 헤드라이트를 켠 군용 지프차에 실어 밤길의 서울행을 재촉했다. 하지만 뒤늦게 환국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요인들이 머문 경교장과 혼마치 호텔 주위에는 연일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김성숙도 숙소에서 나와 야수적인 일제치하를 견뎌낸 동포들을 위로하면서, 광복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