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좌우합작운동 ==== 1945년 12월 4일, 김성숙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한국의 대중이 기대하는 완전독립을 못 가져온 것은 심히 불안하다. 돌아온 나로서는 도리어 일본제국주의 살인적 압박 밑에서 착취당해온 인민 대중을 위안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외적 힘을 버리고 대중과 힘을 합하여 대중이 옹호하는 전국적 통일정권을 수립하려고 한다. 우리 임시 정부에 대해서는 국내의 진보적 대중이 과소 또는 과대 평가하지 말고 정당히 평가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표방하는 바는 어느 일개의 계급을 대표하는 정강 정책과는 다르다. 오직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진보적 정책 정강을 내세우는 곳에 진실한 사명이 있고 스스로의 살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 속엔 진보적인 사람도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혁명적 성질로 보아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의 처단 문제는 조금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니 그 구체적 방법은 아직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오직 내가 희망하고 주장하는 우리의 완전 독립을 관철하는 계획은 본질이 있어 계급을 합체시킨 전민족의 단결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진보적 정강 정책을 내세우는 동시에 친미 반소, 친소 반미 그 어느 것도 아닌 친미 친소로서 모든 모순을 해소시키는 데 있으며, 우리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대다수도 이것을 위해 엄정히 노력하고 있다. >---- >'자유신문' 1945년 12월 4일자 기사, <국무위원 김성숙씨 발언> 이후 경교장에서 열린 임정의 첫번째 국무위원회에서는 우선 좌우익 각 정당 대표자를 소집하여 비상정치회의를 조직하고, 이 회의에서 다시 비상국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자는 의견이 다수로 결정되었다. 김성숙은 그 대표자 회의를 위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회의에서 임정 요인의 우익 편향을 지적하고 회의에서 탈퇴했다. 결국 비상정치회의는 정상대로 이행되지 않고 1946년 2월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의원에 임정의 참여로 귀결되었다. 김성숙은 임정이 남조선 과도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극렬 반대하다가 급기야 임정에서 이탈했다. 이에 대해 김성숙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래 내가 막 떠들었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민족을 대표해서 정부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외국 군정의 자문기관으로 기어들어간다면 국무회의도 그만두고 말아라. 회의는 무슨 회의냐? 무엇으로 국무회의를 여는 거냐? 개인 자격으로 들어간다면 임시정부를 없애고 들어가라. 이게 뭐냐?" 막 떠들었지요.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김성숙은 임정을 떠난 뒤 좌우 합작 노선을 가겠다고 표방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해 민전의 중앙의원, 중앙상임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그는 자주, 민주, 통일, 독립의 4대 원칙을 제시하면서 민족 내부의 총단결을 강조하는 입장을 제창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노선을 구현하고자 각처를 돌아다니며 강연했다. 그러던 1946년 3월 25일, 그는 정읍, 부안에서 연설을 하던 중 임시정부가 민주전의원에 가담한 것은 본래의 노선을 이탈한 것이며, 심지어는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의 이 발언은 미군정을 비판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3월 30일 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이후 1946년 9월 말 풀려난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하면서 민전을 11월 말에 탈퇴했다. 그는 민전을 탈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전회의라는 것이 늘 짜고 나와서 하니, 나는 그게 싫더군. 공산당 놈들이 미리 토의해서 결정해 놓은 것, 이걸 우리는 앉아서 민전 이름으로 결정해 주는 것이야. 그때 내가 여운형씨를 자주 만났어요. 내 정견을 쭉 이야기했더니 참 옳다고 해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간 노선을 걷자는 것입니다. 그래 민전을 함께 탈퇴하기로 하고 나왔지요.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7년 4월에 그이와 근로 인민당, 약칭 근민당을 함께 조직했지요. >내가 원래 민전에 들어갈 때도 "민전은 문호를 개방해 모든 양보와 타협으로 우익 각 당파와 합작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을 내세웠었어. 그랬었는데 민전의 정책이 점점 좌익소아병적으로 수행되어 민족적 단결은 고사하고 민족의 분열을 더욱 격화시키기에 탈퇴했던 것이지. 그러니 근민당을 새로 시작하면서 좌우 합작의 깃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지. 나는 그래서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추진하는 좌우 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했어. 좌우 합작위원회를 민족통일전선으로 재편성하자고 주장하기도 했고.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김성숙은 정당통일 운동도 전개해 남북 주요 정당 대표자회의를 추진했다. 그러나 북한 측이 실무 협의를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김성숙은 북한 측과 협의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회의가 열리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이후 1948년에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지만, 이듬해 [[김구]]가 암살당하자 좌우합작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1949년 12월 근로인민당 해체를 선언함과 동시에 북한정권 반대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