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쓸쓸한 말년 ==== 그러던 1964년, 정치 활동 재개를 허락받은 김성숙은 민중당에서 분리된 [[윤보선]]이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주도하는 보수 야당 [[신한당]]에 입당했다. 신한당이 다시 합류하게 되어 야권 대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신민당이 탄생하게 되고 운영위원.지도위원을 역임했다. 당시 혁신 정당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길은 보수야당일 지언정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는 당에 몸을 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무렵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가 1964년 1월부터 1년간 작성한 '혁명일기'에는 "집에 쌀이 떨어지고 돈 한 푼 없어서 탁발하러 외출"이라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또한 그는 이무렵에 심한 천식을 앓았고 4월부터 '나의 혁명 생활'이라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지만 건강 악화로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 >만약에 식생활 문제만 해결하게 되면 안심하고 독서와 저작에 노력해보고 싶다. >---- >'혁명일기' 1964년 3월 17일. 김성숙의 혁명 일기는 매일 200자 원고지 2~3매 분량의 국한문으로 쓰였다. 짧은 일기에는 생활, 가족, 교우, 국내외 정세 등이 진솔하게 담겼고, 중국에 남아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꿈에 나온 이야기도 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항산의 전언에 의하면 나와 소해 선생은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한 소식이다. 표창을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독립무공자(獨立無功者)임을 자인하는 사람이므로 표창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불평할 리 없는 것이고 또 현정권이 나를 유공자라고 해서 표창한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관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이 되지 못하고 외국세력 하에서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 >---- >'혁명일기' 1964년 12월 23일. 김성숙은 말년에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지, 후배들이 그와 같은 혁신계 인사인 [[구익균]]의 집마당 한 모퉁이에 건평 11평의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문 위에 ‘피우정(避雨亭)’이라는 목각 현판을 걸었다. 그 후 김성숙은 약값을 마련하는 것도 힘겨워하는 처지에 짓눌리며 천식에 시달리다가 1969년 4월 12일 피우정에서 세상을 등졌다. 향년 71세. 김성숙의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파주군 장곡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4년에 유해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이장했다. [[분류:1898년 출생]][[분류:철산군 출신 인물]][[분류:상산 김씨]][[분류:일제강점기의 승려]][[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196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