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상하이 ==== 상하이에 도착한 김성숙은 그곳에 은둔했다. 그의 동료 오성륜과 [[김산]] 등이 [[중국 공산당]]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과 달리, 김성숙은 [[중국 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한동안 한인독립운동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9년 [[두쥔후이]]와 결혼한 후 원고 집필 및 번역 활동으로 생활했고 김산, 오성륜 등 어려운 처지의 동지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줬다. 이후 광저우에 잠시 들러 민국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30년 8월 두쥔후이와 함께 중국창작비평위원회에 가입했다. 그는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으로 문학 창작 및 이론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하자, 그는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제의 상하이 침략과 민중학살을 비난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또 <반일민보> 신문의 편집을 맡아 항일전쟁의 현활을 널리 알리고 중국인들의 항일정서를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또한 1928년 이후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의 책을 번역했다. 1935년 일제가 중국 화북 지역을 침략해 중국민의 항일열기가 고조되자, 김성숙 부부는 1935년 12월 12일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연명으로 <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선언>을 발표했다. 김성숙은 이 선언서에 부인 두쥔후이와 함께 서명했다. 또한 그는 두쥔후이가 활동하고 있던 상하이 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했다. 한편, 그는 [[중국공산당]]을 탈당하고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해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했다. 그러다가 제2차 국공합작운동이 급속하게 전개되자, 그는 상하이에서 박건옹, 김산 등 공산주의자 20여 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중국을 위한 혁명이 아닌 조선을 위한 혁명, 곧 민족혁명을 지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김성숙은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 때 이런 생각을 가졌어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전부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버렸다. [[조선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이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이라도 조선혁명을 하도록 노력해보자. 그런데 나 말고도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않은 채 조선의 공산운동이나 조선의 혁명에 몸바치려는 동지들이 있지 않느냐? 이들이 함께 일할 곳을 만들자." >이래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었지요. 이 이름 안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넣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산주의보다 조국의 해방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 단체를 공산주의 단체로 본 것은 사실입니다. 임정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중략) 그때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어요.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강조한 마르크시즘-레닌이즘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여기에 맞서니 나와 내 동지들은 "민족문제가 더 크다. 민족이 독립된 뒤에야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무엇이든지 되지 민족의 독립이 없이 무엇이 되느냐"라고 역설했지요. 그리고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이 민족주의와 합작해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