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숙(1898) (문단 편집) ==== 난징 ==== 1937년 8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가 함락 위기에 처하자, 김성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옮겼다. 좌파세력은 난징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는데, 여기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이 결합되었다. 김성숙은 조선민족전선연맹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서거하자, 김성숙은 창간호에 애도문을 발표했다. 애도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위대한 민족해방운동가이자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이 3월 10일 적군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조선민족, 특히 선생과 혁명사업을 책동안 오랜 동지들과 도산 선생의 지휘하에 혁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수한 청년들은 선생의 오랜 해외 망명생활 중에 만난 잔혹한 조운과 그에 대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 >도산선생은 향년 61세로 원로 혁명가셨다. 선생은 30여년간의 망국생활 하면서 줄곧 조선 민족의 자유독립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했다. 특히 나라를 잃은 후에도 해외로 망명해 만주, 상해 및 미주 각지에서 혁명동지들을 도우며 사단을 조직해 혁명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 대혁명 당시, 선생은 한국 임시정부에 가입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는 혁명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고, 그 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지휘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 >1.28 전쟁 후 [[윤봉길]] 열사의 폭탄 투여 사건으로 상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도산선생은 상해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경성의 감옥으로 이송된 후 5,6년 간의 처참한 철창생활을 하다가 병환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번 중일전쟁 발발 시 선생은 적군의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노병으로 적군들의 심문을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던 바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독립 투쟁을 위해 희생된 도산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 >선생은 혁명운동 중 전 민족의 힘을 모으고 "착실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정신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야 함을 주장하셨다. 왜적이 대대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전 조선민족 반일반전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게 된 오늘날 특히 전 민족 반일통일전선운동이 막 고조되었을 때, 선생의 육체는 비록 적군들에 의해 잃게 되었지만 선생의 혁명 정신이 모든 혁명가 마음 속 깊이 영원히 새기며 혁명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산선생을 애도해야 하고, 전 민족 단결의 힘을 모아 전 민족의 통일전선을 건립하고자 했던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무찔러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