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소월 (문단 편집) == 생애 == 1902년 [[평안북도(이북5도위원회)|평안북도]] [[구성시#이북 5도 위원회 기준 행정구역|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이북5도위원회)|평안북도]] [[정주시#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 [[김(성씨)|공주 김씨]] 집성촌이다.]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하며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는데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왔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서울특별시|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김소월보다 오래 살아서 훗날 김소월에 관한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71629_36820_2929.gif|width=220]]}}}|| ||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던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五山學校)[*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 중학부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던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김소월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물이다. 평소 김소월은 김억을 존경했으며 김소월의 유고 시인 <[[삼수갑산]]>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시다. 다만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의혹이 있다.]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 김소월의 시 중 <제이 엠 에스(JMS)>라는 시가 있는데 조만식의 [[이니셜]]을 따서 지은 것이다.]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았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학당|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일본군의 학살|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했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김소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쿄시|도쿄]] 유학파였다.]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 <[[벙어리 삼룡이]]>를 쓴 작가다.]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시|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할아버지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본 제국|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출혈|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하며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가 아편을 먹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가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