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순애(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 김순애와 가족들이 망명한 통화현에는 [[이회영]] 등이 건설하고 있던 조선 독립군 기지와 조선인촌이 있었다. 김필순은 이 곳에서 병원을 열고 모든 수입의 대부분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이회영의 신흥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북으로 이동했다가 1916년 내몽골 근처 치치하얼에 정착했다. 김필순은 이곳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구입해 조선인촌 건설에 착수했다. 김순애는 이러한 오빠의 사업에 힘을 보탰다. 그녀는 치치하얼에서 늘 말을 타고 조선인촌의 농토를 둘러보곤 했다. 그러면서 공부에 전념해 사립 명덕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와 영어를 배웠고, 다양한 과목을 수학하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또한 그녀는 오빠의 심부름을 도맡아 때로는 행상 차림으로, 떄로는 하인이나 어리숙한 중국 시골아낙 복장으로 돈이나 편지를 감추고 [[서병호]]나 김규식에게 전하곤 했다. 이렇듯 김순애는 오빠의 연락책으로 김규식과 자주 접하면서 차츰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사실 그녀는 고된 [[시집살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어머니 안씨가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애원하자, 그녀는 김규식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김규식은 첫 아내와 사별한 처지였는데, 김필순의 소개로 김순애와 만나 1918년 12월 말 난징의 어느 선교사 댁에서 김순애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례를 치른 지 불과 십여 일만에 상하이로 갔다가 이듬해 1월 말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가서 파리 장서를 전달하고자 중국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김순애는 훗날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간단한 혼인서약과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한 결혼이지만, 남편이 떠나기 전 2주간은 단 한 번의 합방도 못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남편은 외교특사의 계획과 준비로, 자신은 낮에는 신한청년당 일에 전념했고 밤에는 프랑스에 갈 남편의 의복 바느질로 매일 밤을 꼬박세웠다고 한다.[* 출처: 박규원, <상하이 올드데이스>] 이후 김순애는 2월 중순경 신한청년당의 서병호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건과 국내 독립운동의 궐기 독려를 위해 상하이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김순애는 부산에서 조카 [[김마리아(1891)|김마리아]]를 만나 상하이 지역의 활동을 알리고 각자 활동을 위해 다시 헤어졌다. 김순애는 대구 지역을 담당하여 백남채 등 기독교 인사들과 만난 뒤 광주를 거쳐 2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김필순이 근무했던 제중원의학교에 환자로 가장하여 들어간 뒤 간호원의 도움으로 함태영 목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상하이 독립운동 상황과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 및 지원 요구 등 당의 지령을 전달했다. 함태영은 서울에서도 이미 거족적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서울은 위험하니 즉시 평양으로 가서 상하이 및 파리 강화회의 파견에 대한 내용을 보고하라고 알렸다. 이에 따라 평양으로 간 그녀는 김애희와 비밀리에 만나서 평양에 있는 민족대표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알렸다. 그 후 속히 평양을 탈출하라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3.1 운동]]에는 가담하지 못하고 2월 28일에 국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김순애는 치치하얼로 돌아간 뒤 헤이룽장 국립여자사범학교의 학감으로 취직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인 동포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영사관에 연행되어 취조받았다. 그들은 남편의 행방을 묻고 독립운동 상황에 대한 것을 취조했다. 이에 김순애는 밤을 샌 취조를 받으면서도 중국어로 취조 내용을 모두 부인하고 자신은 평범한 중국 여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 영사는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음을 알고 중국 경찰에 넘겼고, 김순애는 중국 관헌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탈출해 위기를 모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