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순애(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대한애국부인회 === 상하이에 도착한 김순애는 1919년 4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을 모아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부인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출범 직후 다수의 여성들이 가담해 6월 경에는 회원수가 6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적십자 활동을 위한 연습 준비에 착수하는 등 비교적 원활한 운영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들은 국내외의 여러 지역에서 애국부인회 뿐만 아니라 적십자회까지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다양한 부인회와 연계해 여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19년 6월, 김순애는 상하이 애국부인회 회장으로서 교민간의 친목과 정보 교환 및 출판 활동을 목적으로 국내 및 각지 애국부인회에 서신을 보내 앞으로 통신과 연락을 취해 상호 이익과 도움을 주자고 권했다. 그해 9월, 애국부인회의 부서 및 역원이 선정되어 회장, 부회장 외 총무, 서기, 회계, 출판부, 교제, 사찰 등의 부서를 두었다. 김순애는 조직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회장 직에 이화숙을 선임하고 자신은 집사장을 맡아 뒤에서 후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상하이 임정 및 임정의 중요 인맥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임정의 외곽지원단체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임정의 요원으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활동을 비밀리에 행하고, 상해에서는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출범은 이후 해외 각지의 애국부인회 조직으로 이어져 해외 여성역량의 결집이란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9월 훈춘에서 대한애국부인회, 1921년 3월에는 천진에서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고, 뒤이어 간도부인애국회 등이 차례로 조직되었다. 또한 대한애국부인회는 독립자금 모금 및 공채소화를 통해 임시정부재정을 조달하고, 군무부의 의용병을 권유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망명지사나 독립군의 편의를 제공했으며, 독립전쟁준비를 위해 적십자회의 간호부 양성에도 힘을 더했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사진첩을 만들어 세계에 보내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독립운동사료나 선전자료 수집에 종사했으며, 한국지도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임시정부의 회의장을 준비하는 등 애국심을 고취하고 임시정부활동을 선전하는 대중계몽 사업도 추진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교육 역시 중시하여 정애경, 김연실 등 회원들이 인성학교 교사로서 구국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회원들은 자신들이 제작한 자수 제품을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헌납했고, 외국인들이 이 제품을 상당한 가격에 매입해 임정 경비에 보탬이 되었다. 그 밖에도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해 1922년 4월 유료 가무극대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김순애는 유능한 외교관 역할도 도맡았다. 그녀는 애국부인회 회장 김원경, 김연실 등과 함께 1920년 3월 8일부터 4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상하이의 남녀학교를 돌면서 한중문제란 주제로 연설해 중국 청년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순회강연회의 주제는 '국적을 대함은 군기재정에만 아니오 교육에 있다', '대한적십자사 선전연설', '여자청년회의 직책', '한국독립과 세계평화의 관계와 한중 양국의 병진할 필요', '한국독립운동에서 치열한 학생 활동', '일화배척이 중국에서 실패한 이유', '한국독립운동과 인민의 만행' 등이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김순애는 5회 강연에서 자신이 9년 전에 조국을 떠나 중국에 입국한 이유와 한중 관계에 대해 연설하면서 "9년 전에 중국에 와서 일천만 한국 여자를 대하여 한중 양국의 제휴를 도모한다."고 말하자 회중이 박수를 보내며 그녀를 동포로 인정했다고 한다. 또한 6회 강연에서 김순애가 "한국독립운동에 학생의 활동이 치열하였음을 말하고 일화배척이 시베리아에서는 성공되고 중국에서 실패한 원인을 언급"하자, 청중이 눈물을 흘리고 굳게 결심을 가지기를 약속하고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만세를 합창한 후 학생 일동이 여사를 동포로 인정한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또한 김순애는 순회강연회에서 당의 기관지인 <한한청년> 120여 권을 판매해 자신이 속한 신한청년당의 선전에도 일조했다. 1922년 3월 28일, [[김익상]]과 오성륜(吳成崙)이 일본군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했다가 영국 여성 스나이더 부인이 애먼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임정의 입장이 곤란해졌는데, 김순애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녀는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담은 기념품과 위로의 편지를 스나이더 부인의 남편에게 보냈다. 그 진정성을 받아들인 남편은 애국부인회에게 호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일본 당국에게 김익상, 오성륜에게 선처를 베풀 것을 요청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김순애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신한청년당은 개조론을 지지했고, 대한애국부인회 역시 개조론을 지지했다. 그런데 신한청년당원이자 김순애의 남편인 [[김규식]]은 창조론을 주장해 신한청년당과 대립된 위치에 섰다. 이로 인해 김순애는 남편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김순애는 석상에 서서 창조론과 개조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통일하려고 선서한 일이 장쾌하다. 목적은 같으나 방법이 다르다. 나는 계통을 주장하려다가 창조라도 할까 하였다. 개조도 어렵고 창조도 어렵지만 딴 기관을 또 세우면 좋겠다. 그녀는 이 발언 후 창조파를 지지한 것으로 간주되어 애국부인회의 결정에 따라 대표직을 상실했다. 결국 이 회의는 독립운동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서로 상처만 남기고 끝났고,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