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순애(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김순애는 대한애국부인회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활약했다. 1920년 1월 상하이에서 의용단이 결성되었을 때 유일한 여성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독립군이 되어서 국사에 따를 것을 서약했다. 그리고 1919년 8월 [[손정도]], 서병호, 안창호 등이 내무부의 승인을 얻어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했을 때, 김순애는 대한적십자회의 회원이 되어 활동했고 이사 직을 맡기도 했다. 1920년 11월에는 상해대한거류민단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해 가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자들의 옷 세탁을 도맡아 하고, 삯바느질도 하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1926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김순애는 금보연 등과 함께 정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30년 8월 16일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趙鳳元)과 임시정부 외무장 오영선의 부인 오의순 등과 함께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은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의 정체된 활동 상태를 비판, 반성하고 보다 급진적인 활동 노선을 추구했다. 이후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와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이 서로 마찰을 빛었다가 [[김구]] 등의 중재를 통해 상하이한인애국부인회는 비교적 연장자를,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은 16세 이상 28세 이하 연소자를 조직원으로 하도록 합의했다. 당시 김순애는 42세였지만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이 단체에서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1운동 기념일에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주도했다. 1932년 4월 2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일제의 임시정부에 대한 추적이 심화되자,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抗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둥(廣東),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지를 유랑했다. 그러다가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상의 주의와 이념이 다른 조직들을 통합하는 통일전선운동을 추진했다. 김순애는 여기에 호응하여 1943년 1월 말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결성하였고 그해 2월 23일에 각계 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해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현 정국은 전세계 반 파시스트 대전의 최후 승리와 우리 원수 일본 제국주의의 결정적 패망이 우리 눈앞에 박도하고 있는 위대한 역사적 신시기이다. (중략) 애국부인회는 25년 전 3.1 혁명의 위대한 유혈투쟁 중에서 탄생한 우리 역사상 신기인인 부인의 혁명단체였고 또 민족정기의 뿌리다. (중략) 지금 세계 30여개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는 이 시기에 충칭의 혁명 여성들은 당파나 사상을 넘어 일치단혈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립하여 국내와 세계 만방의 애국 여성이 총단결하여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을 완성하자. >---- >대한애국부인회 재건대회 재건선언 中 >국내외의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되 남녀 간에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전민족 해방 운동을 총영도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며, 세계 반 시스트 부녀의 국제적 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 세계 여성과 전 인류의 영원한 화평 행복을 위한 공동 분투를 하자. >---- >대한애국부인회 재건대회 7개 강령 中 재건 애국부인회는 김순애 주석을 비롯하여 부주석 [[방순희]], 서무부 주임 최소정, 조직부 주임 [[연미당]], 훈련부 주임 [[정정화]], 선전부 주임 김윤택, 사교부 주임 [[권기옥]], 재무부 주임 [[강영파]] 등이 간부로 선출되었다. 주석에 김순애가 추대된 것은 남편 김규식이 한국 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를 아우르는 역할을 담당했듯이 그녀도 각 당 여성들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여성독립운동계 원로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애국부인회는 음력 정월 초하루 교포의 망명 생활을 위로하기 위해 다과회와 여흥을 주최했다. 또한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 여성들과 국내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광파 방송을 해 애국부인회 선전 활동을 벌였다. 또한 위문금품을 거두어 광복군을 위문했고, 1945년 봄 임시정부가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인계해온 한국 위안부 여성들 10여 명을 위로하고 계몽 교육해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게 했으며, 해외 각지의 한국여성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구축해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 및 성원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 1943년 5월 5일, 한국애국부인회는 중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연맹, 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 이 대회는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가 워싱턴 회담에서 전후에 한국을 독립시키기 전에 국제 감시 보호하에 두기로 합의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때 김순애는 주석단으로 추대되어 한국민족의 독립, 민족국가의 건설 등을 골자로 하는 4개항의 재중국한인대회 선언 발표에 한 몫했다. 또한 대회 주석단의 명의로 각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통해 부당한 언론 탄압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했다. 아울러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 채택, 발표에도 관여했다.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 >---- >재중자유한인대회,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