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승권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95년]] 대전고를 졸업하자마자 연고팀 [[한화 이글스|한화]]에 입단했는데[* 원래 [[단국대학교|단국대]]로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수능 점수 미달로 탈락했다. 이를 두고 프로 입단을 두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22200289119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12-22&officeId=00028&pageNo=19&printNo=2101&publishType=00010|일부러 시험을 망쳤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주 포지션이 2루수였음에도 [[이정훈(1963)|이정훈]]이 달았던 등번호 10번을 그대로 물려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엔 [[전대영]]이 은퇴하고, 2루가 사실상 무주공산이었던 상황인지라 어느 정도 기회가 왔다. 그러나 2할대 초반 밖에 못치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1997년]]~[[1998년]]은 군에서 복무했다. [[1999년]] 시즌을 앞두고 전역, 팀에 다시 복귀해 우승반지를 손에 넣지만 여전히 타격이 좋지 못했고, [[임수민(야구선수)|임과장님]]과 [[백재호]]가 2루를 지키고 있어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2001년]] [[4월 27일]], 포수 [[김영진(야구)|김영진]]과 외야수 조정권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 2001년은 김승권의 커리어 하이였다. 78경기에 나와서 2할 7푼 2리라는 성적을 거둔 것. 이 당시 내야진을 살펴 보면 [[정경배]], [[박정환(1977)|박정환]], 김승권이 2루를 두고 경쟁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78경기에 나왔고, 평생 2할 6푼 이상 못 칠 것만 같던 김승권이 2할 7푼을 쳤으니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다만 2루수 자리를 두고 경합한 3명 중 김승권의 출장경기 수와 타수가 제일 적었다. 거기에 시즌 후반 삼성이 외국인 타자로 2루수 요원인 [[카를로스 바에르가]]를 영입하면서 2루 경쟁자가 더 늘었다. 사실상 김승권은 이적 첫 해인 2001년부터 정경배와 박정환의 백업이었던 셈. 그래도 이 해 자신의 커리어 최다인 홈런 6개를 쳤는데, 그 중 2개가 끝내기 홈런이었다. 2001년 시즌 후 부진했던 [[정경배]]가 6대2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됐지만, 2002년에는 겨우 12경기에 출장하면서 타율도 1할 7푼 9리로 타율이 추락했다. 그나마 [[2002년 한국시리즈]]에 백업 내야수로 엔트리에 승선하면서 두 번째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결국 삼성에서도 자리를 잃은 뒤 2003년 초 외야수 [[임재철]]과 묶여 좌완투수 [[지승민]]과 내야수 [[고지행]]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며 2년 만에 고향 팀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임과장님이 있었고, [[한상훈]]에게 밀려서 백업자리도 없었다. 결국 2년간 1할대 타율에 매년 20경기 남짓 출장하는데 그쳤고, 2005년 시즌 후 방출됐다. 2004년 FA [[박종호(1973)|박종호]]가 삼성으로 이적해 2루가 비었고, [[박진만]]마저 이듬해에 FA로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내야 센터라인이 비게 된 [[현대 유니콘스|현대]]에서는 수비형 내야수인 김승권을 영입했다. 그러나 [[채종국]], [[서한규]], [[김일경(야구)|김일경]], [[지석훈]]에게 밀려서 8경기 나온 게 전부였다. 2006년에는 시즌 초반 잠깐 반짝했지만 점점 다른 선수들에게 밀렸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